스탠다드 시스템 카페
‘스탠다드 시스템’ 카페는 청담동 직장에서 가까운 필터커피 전문 카페다. 카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해놓았지만, 정작 찾아가지 못했다. 6시 30분 오더 마감 때문이다. 퇴근 시간이 6시 30분이니 평일에는 도무지 갈 방법이 없었다. 주말 집에서 가기엔 너무 먼 곳이다. 오늘 금요일 모처럼 일이 일찍 끝나면서 기회가 생겼고, 나는 4시경 퇴근하자마자 스탠다드 시스템으로 갔다. 900여 미터 거리의 카페에 도착하니 두 테이블 정도의 손님들이 있다. 한 팀은 연인으로 보이고, 다른 한 팀은 중국인 관광객들. 머그컵과 원두 등 기념품을 사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수다를 떠드는 중국인들의 잡음을 뚫고, 카운터로 발길을 옮긴다.
향긋한 원두 냄새가 좋다. 제일 날 자극한 건 가장 비싼 가격의 에디오피아 게샤빌리지 원두. 한 잔에 1만 5,000원이라 고민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게샤빌리지를 필터커피로 주문하고, 더불어 스탠다드 시스템의 시그니처 ‘라비앙로즈’도 주문한다. 한꺼번에 두 잔을 주문하고서 1인석에 앉는다. 요즘 보고 있는 김혜리 기자의 영화 산문집을 꺼내 들었지만 카페를 구경하느라 책으로 눈이 가지 않는다. 책은 한 장의 사진을 위한 장식이 될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스타가 커피 두 잔을 내게 갖다 준다. 라비앙로즈는 에스프레소 위로 분홍색 크림이 얹혀 있다. 맨 위 장미 모양의 장식이 귀엽다. 소위 말하는 ‘인스타그램 갬성’이라는 게 이런 것이군. 게샤빌리지 원두로 내린 필터커피는 은은한 향이 인상적이다. 한 모금 마시니 입 안으로 향긋한 청포도의 산미와 복숭아의 단맛이 조화롭게 들어온다. 산미와 단맛 모두 자극적이지 않다. 마시는 순간 이건 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커피라고 느낀다. 원두를 사고 싶었지만 매장 판매용 두 잔 분량의 원두만 남아 있다고.
라비앙로즈의 하단부에는 에티오피아 블렌딩 원두로 내린 커피가, 위에는 히비스커스와 장미 향이 느껴지는 크림이 얹혀 있다.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다. 크림을 스푼으로 떠 먹고, 잔을 들어 하단부의 커피를 들이마시니 크림과 커피가 입 안에서 이상적으로 뒤섞인다. 불호가 없는 맛이니 많은 이에게 사랑받을 만하다고 느낀다. 게샤빌리지 원두를 사지 못한 게 아쉬워 결국 케냐 원두를 대신 구매하고 서비스로 케냐 커피를 한 잔 받는다. 고소하고 은은한 단맛이 일품이다.
혼자 찾은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나면 언제나 행복과 아쉬운 감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혼자이지만 커피 하나로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그렇지만 동시에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아쉬움. 누군가는 인생은 원래 혼자라고 말한다. 옆에 누가 있어도 외로운 건 똑같으니 더 이상 어리광 부리지 말란다. 다른 누군가는 늦지 않았으니 직접 움직여서 인연을 찾아보라고 한다. 하지만 1980년생 미혼 남성이 현실적으로 이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너무 많다. 장애물이 너무 많으니 다 넘기도 전에 포기하는 게 일상이다. 혼자가 편해서 좋지만, 혼자여서 불편하기도 하다.
인간은 원래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좋은데 씁쓸하고, 씁쓸하지만 편안하고, 편안하지만 외롭다. 귀신보다는 사람이 더 무섭고 믿을 수 없다고 느끼는 요즘, 가장 불신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앞의 커피뿐이다. 그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본인이 품은 향과 맛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니까. 헷갈릴 이유도 없다. 누군가 정해놓은 테이스팅 노트가 정답은 아니다. 내가 느끼는 향과 맛이 곧 답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커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결론은, 오늘 다녀온 스탠다드 시스템에서 나는 내가 커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만났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