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좋은 친구

-카일커피

by 초생달

작년 5월 처음으로 중랑구 신내동이란 곳으로 이사를 왔다.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서 태어나 도봉구 쌍문동민으로 살았던 나는 성인이 돼 부모님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민이 됐다. 오랜 기간 경기도에서 살며 장시간 출퇴근에 익숙해졌다. 다시 나가 살며 선택했던 곳은 남양주시 다산동. 신축 빌라에서 살다가 다시 옮긴 곳이 서울 중랑구 신내동이다. 이곳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지인도, 친척도, 친구도 없는 이곳에 둥지를 튼 이유는 단 하나, 서울에서 집값이 싼 지역에 속했기 때문이다. 강남구 청담동에 직장이 있는 내가 왜 그곳이 싫겠는가. 나도 경제적으로 허락한다면 직장 인근에서 살며 편하게 다니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시궁창인 법이지. 월급날만 기다리는 직장인이니까 말이다.


신내동으로 이사를 온 지 1년이 넘도록 내가 밟은 길은 거의 비슷했다. 출퇴근을 위해 다니는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 금연껌을 위해 약국에 들를 때마다 찾는 중랑구청 사거리, 집 근처에서 이발하기 위해 선택한 도보 10~15분 거리의 헤어샵 정도였다.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집에서 만들고 내릴 생각만 하고, 동네 카페에 들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집에 수동 에스프레소 기계과 드립 세트, 우유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스티밍 기구, 각종 카페에서 주문한 원두 등 홈카페를 차려놨으니 카페를 생각하긴 어려웠다. 집에서 필터커피와 각종 라떼 음료까지 척척 만들어 마셨다.


매일 같은 방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인터넷에서 살펴본 레시피로 각기 다르게 커피를 내려보기도 했으나 그것도 곧 지루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 내 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동네 카페를 찾아다녀야겠다고 결심했다. 내년이면 다시 다른 지역으로 떠날지도 모르지만, 그전까지는 이곳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2년을 살면서 ‘신내동이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못한다면 창피할 것 같았다. “네, 신내동은 이런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라고 학구적으로 대답하진 못하더라도, “이런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카페가 있고, 저런 재미가 있는 곳이죠”라는 정도로는 대답하고 싶었다.


카일커피를 선택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집에서 도보 15분 거리,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에 위치한 그 카페가 필터커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카페에 들르면 항상 그곳의 필터커피 한 잔과 시그니처 메뉴 한 잔을 고른다. 필터커피는 복숭아 맛이 느껴진다는 에티오피아 콩가 원두, 시그니처는 ‘단호박 크림 라떼’를 선택한다. 주인은 시그니처를 아이스로 마실 건지 따듯하게 마실 건지 묻는다. 추천해달라고 하니 따듯하게 먹어야 단호박 크림의 맛이 좀 더 살아날 거란다. 그렇다면 당연히 따듯하게 마셔봐야겠지. 주문을 완료하고 카페 내부를 살펴본다. 토요일 오후를 맞아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나온 두 어머님이 있다. 작지만 깔끔하고 잘 정돈된 공간이다. 불투명한 플라스틱 1인 좌석을 앞으로 빼니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돌이 보인다. 아, 이곳에 살포시 두 발을 올려놓고 마시라는 거구나. 귀엽네.

주인은 먼저 시그니처 단호박 크림 라떼를 갖다 준다. 부드럽고 진한 라떼 음료 위에 달콤한 단호박 크림이 얹혀 있다. 스푼으로 크림을 떠 입안으로 가져간다. 달콤하지만 과하지 않은 단호박 크림이 입안에 퍼지니 금세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번에는 컵을 들어 크림과 라떼를 함께 마신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라떼와 달콤한 크림의 균형감이 적절하다. 아이스 라떼였다면 이 균형감이 덜 느껴졌으리라. 주인의 혜안에 감탄하며 연실 입으로 가져간다. 이어서 필터커피를 내온다. 전날 ‘스탠다드 시스템’에서 맛본 에티오피아 게샤빌리지 커피의 복숭아 맛에 매료됐던 나는 이 커피 역시 기대한다. 솔직히 게샤빌리지만큼 강렬한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복숭아의 단맛과 블루베리의 은은한 산미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개성이 강하다거나 묵직하지는 않지만 ‘데일리 커피’로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맛이다. 토요일 오후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른 이 동네 주민에게는 더 없이 적절한 맛이었으리라.

카일커피의 매력은 아무래도 밸런스, 균형감각이다. 커피의 맛도 그렇지만, 공간 구성 역시 마찬가지다. 과한 키치를 내세우지도 않고, 이런 맛이어야 하고 이 공간은 이래야 한다는 소위 ‘잘 나가는 카페’들의 자기애가 덜하다. 지나친 자기혐오를 싫어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나친 자기애도 경계한다. 손님에 대한 배려보다, 카페 콘셉트와 주인의 ‘에고’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공간에서는 오랜 시간 편안하게 머무를 수 없다. 본인들을 트렌드세터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이들이 득실거리는 번화가 카페 중 일부가 보여주는 지나친 ‘인스타그램용 갬성’을 보고 있자면, 커피와 카페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카페는 사람과 시간을 부드럽게 연결해주는 곳이다. 좋은 카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이래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고, 보여주기보다는 은은히 드러낸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지만 눈과 귀가 밝은 사람들은 그 공간이 품은 다양한 이야기를 금세 알아챈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규정된 것들이 아니다. 그건 거울과도 같은 거니까. 좋은 카페는 누구나 그곳에서 나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 그러니까 카일커피에서 나는 아주 잠시나마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균형감이 좋지 않았다면 얼굴 찡그리며 현실로 돌아왔을 게 뻔하다. 좋은 카페에서 잠시 꿈꾸듯 만난 이야기들 덕분에 행복했다. 그게 무슨 이야기였냐고?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 없다. 당신도 좋은 카페를 들러 꿈을 꾸게 된다면 절대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마시라. 그건 오직 세상에서 단 한 명, 당신만을 위한 이야기일 테니까.


만나기 전에는 서먹서먹하고 낯선데 정작 만나서 대화 나누다 보면 오해가 풀린다. 좋은 친구가 그렇다. 토요일 오후 내가 동네 근처에서 만난 카일커피는 그동안은 잘 몰랐지만 ‘알고 보면 좋은 친구’였다. 이 동네를 떠날 때까지 얼마나 더 찾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난 이 카페를 언제고 그리워하다가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좋은 친구란 언제 찾아도 편안하고 아늑하고 포근한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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