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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Jul 24. 2024

내 청춘을 닫으며

남의 돈을 받아가는 대신, 하루 대부분 내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직장 생활이 어렵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처음 시작했던 그 무렵에는 더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씻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지하철에 몸을 실어 회사로 가는 그 일, 어느 직장인이든 매일 겪는 그 일이 너무 고됐다. 두 발은 돌을 매단 듯 무겁고, 머리는 지끈거리기 일쑤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6개월 후 입학한 대학원을 1년도 안 돼 그만둔 건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중형 서점과 지역의 작은 언론사를 짧게 다니다 입사한 곳이 대학로 혜화동에 위치한 한 출판사였다. 소설과 에세이, 신학 관련된 책을 출판하는 그곳은 장기근속자들이 많았고, 나는 ‘젊은 피 수혈’의 일부로 간택됐다. 위층에는 유명 감독이 운영하는 영화사가 있었고, 지하에는 한 가지 작품만 장기 상연 중인 극장이 있었다. 극장은 학전그린, 작품은 <지하철 1호선>이었다.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보도자료는 어떻게 쓰는지 배우던 입사 첫 주, 출판사 관리자는 입사 기념이라며 티켓 한 장을 건넸다. “우리 출판사에 입사하면 누구나 이 작품을 봐야 해요. 아래층에 있으니 꼭 보세요.” 회사에서 꼭 보라며 정시 퇴근까지 시켜주며 3만 원짜리 티켓을 공짜로 주니 안 볼 이유가 없었다. 퇴근하자마자 극장을 찾으니 불이 꺼지고 등장인물이 등장하기 전에 라이브 밴드의 연주가 시작됐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그 작품에 난데없이 빠져들었다. 연극이 뭔지, 예술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던(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를 뒤흔들었다. 그러니까 3분여 오프닝 연주가 자연스럽게 첫 곡과 이어지고 주인공 선녀가 등장해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작품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뜬눈을 새고 달려왔네. 설레는 마음 미칠 것 같애.” 그 장면을 목도하는 내내 내 마음은 첫 곡 ‘6시 9분 서울역’의 노랫말처럼 미칠 듯이 요동을 쳤다. 1절이 끝나고 곡의 감정선이 고조되면서 선녀는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서울에 대한 첫인상을 노래로 풀어낸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치와 타락의 비린내”라는 노랫말(서울에 대한 선녀의 첫인상)은 다소 선동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약간의 아쉬움은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노래는 격렬하고 압도적이었다.

 

“산다는 게 참 좋구나”라는 곰보 할매의 노래에 눈물이 맺혔고,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꿔야 해”라고 말하는 걸레의 장면에서는 끝내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지하철 1호선>은 연변 조선족 선녀가 사기꾼에게 속아 서울에 남편감을 만나러 왔다가 하루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다. 세상은 지독하고 거칠고 험난하지만,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선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덕분에 다시 일어나 살아갈 힘을 얻는다. 선녀가 겪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관람하며 ‘살아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누구든, 어디서 무엇을 하든 누구에게나 삶은 고단하다는 것, 나를 무너뜨리려는 것들이 수도 없이 나를 유혹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나는 무너질 수 없다는 것.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 누구에게나 새로운 날이 오고, 나는 매일 새로운 날들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작품을 보는 내내 누군가 내게 “괜찮아, 아직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행복했던 것 같다. “뼛속 깊이 아려오는 이 아픔, 아아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지. 자, 싸우러 가자! 한 발짝씩 한 발짝씩 조금씩만 양말 한 짝을 신는 것도 이긴 거지. 계단 한 칸 올라가는 것도 싸움이지”라는 곰보 할매의 노래에 감격을 느낀 게 비단 나만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지하철 1호선>은 내 청춘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부터 나는 청춘이었던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그 순간부터 말이다. 이 작품을 위대한 음악인이자 공연기획자, 인생의 스승인 김민기 선생이 기획하고 만들었다는 걸 그 이후에 알게 됐다. 뒤늦게 그의 노래를 살펴봤고 특히 ‘봉우리’ 같은 노래에 빠져 청춘을 건넜다.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라고,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이라고 나직이 속삭이는 선생의 노래에 전율을 느끼며 청춘을 버티고 견뎠다. 나를 “어이”나 “저기”가 아니라 “친구여”라고 콕 집어 불러주는 그 노랫말과 음성이 참 좋았더랬다.

 

그래서일까. 22일 선생의 부고(21일 작고)를 뒤늦게 접한 뒤 나는 한참 동안 허탈해하다가 지난 내 청춘의 몇몇 장면을 떠올렸다. 당신의 노랫말과 음성, 연출에 위로받고 힘을 얻어내던 그 시간이 머릿속으로 무수히 스쳐갔다. 뭐라도 쓰고 싶어서 노트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어떻게 쓰든 내가 받았던 그 위안과 평안을 되갚을 순 없으리라. 그래서 이렇게 형편없는 솜씨로 당신에게 고백한다. 당신 덕분에 ‘살아 있는 청춘’의 희열을 알았고, 고단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견디어낼 수 있었다고. 그 모든 시간이 당신 덕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당신을 알게 된 덕에 내 청춘은 조금이라도 빛날 수 있었음을 이제는 알겠다. <지하철 1호선>을 보고, ‘봉우리’를 들으며 느꼈던 그 전율과 감격, 위로는 앞으로도 내 안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이제 당신은 영면해 영원히 이 세계에 닿을 수 없겠지만 언제고 다음 세상에서 만나 다시 당신의 작품을 관람하고 싶다고, 당신의 생생한 노래에 귀 기울이며 ‘산다는 자체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느끼고 싶다고 고백한다. 당신은 내 청춘의 큰 어른이자 스승이었고, 친구이자 동료였다. 잊지 않겠다. 당신은 비루한 나를 비롯해 많은 이의 가슴과 머리에 오래도록 남아 기억되고, 회자되고, 다시 살아날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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