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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Sep 15. 2024

나만의 템포

난 옛것이 좋다. 글을 쓰거나 혼자 작업을 할 때면 20세기 중반 무렵의 재즈나 올드팝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는다. 축음기에서 나오는 듯 오래전 가수들의 목소리가 연주와 함께 치직거리며 흘러나오면 마음이 편해진다. 노래 제목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때론 경쾌하고, 때론 로맨틱하며, 때로는 차분한 목소리들이 귀에 꽂힐 때마다 속으로 ‘행복하다’고 외친다. 결국 옛날 사람이 돼가는 건가. 40대 중반이고 어느 회사에 가든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한 소리 듣는 신세이니 그럴 만한 사람이 된 걸까. 요즘 음악이 싫지는 않다. 가끔 들려오는 멜로디나 리듬에 유난히 귀 기울일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부러 찾아 들을 만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음악뿐만이 아니다. 책도 부러 중고를 구해서 볼 때가 많다. 출판 관계자들은 얼굴 붉힐 말이지만 나는 누군가의 손때를 탄 옛 책을 직접 만져가며 한 쪽 한 쪽 넘겨 보는 게 좋다. 오래된 종이의 구수한 냄새, 옛 스타일의 글자 폰트에 담긴 단아함과 여유로움이 내 미소 버튼이다. 새 책을 사서 구석에 처박아놨다가 몇 달이나 몇 년 후에야 꺼내 볼 때도 있다. 그럴 때도 오래된 책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조지 오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스티븐 킹, 김훈, 서경식, 이청준, 오정희, 진은영, 하루키(에세이) 등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들을 읽을 때 특히 그렇다. 처음 책을 사서 볼 때는 느껴지지 않던 ‘잡념이나 아이디어’가 오래 처박아두고 나서 읽으면 느껴진다. 가끔은 반가운 문구를 만난다. 헌책을 사면 옛 주인이 남긴 흔적을 만나기도 하니까. 힘주어 밑줄을 그은 글귀를 보면 유난히 눈길이 더 간다. 그 문장은 내게 얼마나 와닿는지 생각하다가, 전 주인의 삶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이런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평소 직장을 다니기 힘들었을지도 몰라, 매우 계산적이고 철두철미한 인간임이 분명해. 헌책을 사줘 고맙다며 글귀를 남기거나 선물을 동봉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제 인생의 한 페이지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영향이 있길 바랍니다. 커피믹스를 몇 개 넣었으니 커피를 즐기며 함께 즐겨보세요.” 그런 흔적을 발견할 때면 나는 비로소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살 충동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런 살가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니.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도 마찬가지.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턴 키튼의 무성영화, 진 켈리나 자크 데미의 뮤지컬 영화, 장철의 핏빛 무협영화, 테오 앙겔로폴로스나 키에슬로프스키의 고적한 영화들을 특히 좋아한다. 키에슬로프스키의 TV 시리즈 걸작 <십계> DVD 세트를 사서 일요일 밤이면 가끔 꺼내 한 편씩 본다. 천천히 움직이고 충분히 생각한 후 내뱉는 대사들이 좋다. 쉽게 답을 주기보다 보는 이들의 사유와 상상을 유도하는 방식의 스토리텔링이 사려깊다. 주인공이 아들의 죽음으로 슬퍼하는데 이따금 보이는 무표정의 사내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찬 일요일 밤 내 방이 좋다. 답을 얻지 못해도 괜찮다. 아니, 답이 없어서 더 좋다. 여백과 말줄임표, 침묵을 채우는 시간이 요즘 내게는 유일한 위안이다.     


사람도 진득하게 오래된 이들이 좋다. 세상은 매번 한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그에 따라 우리도 늙어가지만, 마치 그런 자연의 법칙은 상관이 없다는 듯 한곳에 머물러 진득하게 삶을 관조하며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이들 말이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삶을 낙관적으로 볼 줄 아는 어른들이 그립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올라가지 못해도 네 인생은 여전히 그곳에 아름답게 이 공간과 어울린다고 말해줄 어른이 그립다.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건지 모르지. 트렌드를 모르더라도, 젊지 않더라도 너의 삶은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너만의 템포를 꾸준히 유지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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