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다운 순간은 가장 평범한 날들에

매일 한 순간

by 초생달

누군가는 위기에 닥치면 본성이 나온다고 말한다. 평소엔 얌전히 굴던 사람이 위기 상황에서 급해지거나, 평소 타인을 배려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기적으로 굴면 그게 본성이라고. 그럼 그렇지, 하면서 그 사람을 비난하기 일쑤다.


인생을 뒤흔들 만한 위기 상황이 몇 번이나 올까. 그런 드문 상황에 닥치면 사람은 당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게 전혀 이상할 것 같진 않은데. 그런 흔하지 않은 경우에 나타나는 드문 행동이 인간의 본성인 걸까. 그럼 우린 평생 본성이 아닌 가식으로 살아가는 걸까. 가식으로 90~95퍼센트를 살고, 본성은 5~10퍼센트 정도 나온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걸 본성이라고 할 수 있나?


중학생 시절 날 괴롭히던 무리는 자주 장난을 쳤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육교를 건너야 했다. 육교 계단은 꽤 가파른 편이어서 건널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어느 날은 누군가가 나를 세게 밀쳤다. 난 비명을 지르며 난간을 잡아챘다. 계단 밖으로 나가떨어지진 않았지만 주마등이 스칠 만큼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비명과 함께 욕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던 모양이다. 날 밀친 건 그 무리 중 한 명이었고, 그는 내게 이제야 네 본성이 나왔다며 묘하게 웃어댔다. 나는 너를 진즉에 알고 있었지. 넌 착한 척하는 쓰레기일 뿐이야. 마음 같아서는 그 녀석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조심스럽게 걸었다.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못했다. 난 정말 쓰레기인 걸까. 원래 욕쟁이였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인생을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입 다물고 있거나 아주 드물게 화를 냈다. 아주 간혹 욕을 하기도 했다. 그 순간이 아무리 강렬하고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한들 그게 내 본성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몇 초가 700만 분이 넘는 당시 내 인생보다 더 진솔할 수는 없으니까.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늘 걷던 보도블록을 밟으며 출근하고, 점심 메뉴를 고르며 소소하게 고민하고, 잠들기 전 일기장에 몇 줄의 문장을 꾹꾹 눌러 담는 순간들. 그 지루할 만큼 반복되는 일상에서 굳어진 나의 선택들이야말로 진짜 내 모습이 아닐까.


위기는 사람을 시험하지만, 동시에 왜곡하기도 한다. 패닉 상태에서 튀어나온 욕이나 반사적인 방어가 그 사람의 전부일 리 없다. 마찬가지로 위기에서 침착함을 유지한다고 해서 그게 평소의 나약함보다 더 진짜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린 모두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니까.


그날 이후로 나는 ‘본성’이라는 단어를 조금 다르게 보게 됐다. 누군가 극한 상황에서 보인 한 번의 행동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려 할 때, 나는 그 뒤에 있을 수백, 수천 번의 다른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건 뭘까. 한 사람의 최악의 순간인가, 아니면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가.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육교 계단에서 욕을 내뱉은 그 순간보다, 그 후로도 계속 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내렸던 수백 번의 발걸음이 더 나다운 것이었다는 걸. 본성이란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라, 가장 많이 반복한 선택 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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