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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물건

by Jacquesenid

생각해보면 부질없다. 특정 물건들을 몇 년째 버리지 못한다. 할매의 전화번호 수첩과 영상, 군 시절 휴가를 나와 확인했던 대학 동기의 이메일, J의 습작소설과 페이스북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들. 좋아하는 물건들인지, 이 생을 견디기 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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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는 2012년 폭설이 내리던 겨울 대장암 말기로 인한 합병증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당시 나는 할매를 간호하기 위해 퇴근하고 나면 매일 신림동 할매 집에 들러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머물다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전날 할매는 막차를 타기 위해 방을 떠나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10초가량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늦었으니 어서 가라고 했다. 다음 날 퇴근 직전에 할매 소식을 접한 나는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신림동으로 향했다. 가족 및 친척들은 이미 와 있었다. 할매는 눈을 뜨지 못했고 이따금 신음을 뱉어냈다. 몸이 발부터 위로 차츰 차가워지다가 결국 마지막, 할매는 눈을 크게 한 번 떴다 감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난 당시 할매의 마지막 모습을 핸드폰 영상으로 찍어두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뒤 장지에 다녀오고 나서 할매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신림동 집을 찾았다. 화장대 맨 위 서랍에 교회 이름이 쓰인 조그만 수첩이 있었다. 첫 장에는 내 이름과 집 전화번호가 삐뚤빼뚤 쓰여 있었다. 그걸 손에 쥐고 한참을 울었다. 외장하드에 할매 영상이 있고, 내 방 서랍 한 귀퉁이에 전화번호 수첩이 있지만 그 이후로 아직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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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시절 상병인가 병장 휴가를 나왔을 때 과를 옮겼던 여자 동기에게 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과를 옮겼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립다며 언제 다시 뭉쳐보자는 내용이었다. 함께 어울릴 때 즐겁게 대화했을 뿐, 그 동기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가 취업이 안 돼 고향 마산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리고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의 부고를 접했다. 외모 콤플렉스가 심했던 동기가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다가 쓰러졌다던가. 마산까지 가서 장례식에 참여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지난 다음에야 다른 남자 동기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때는 말하지 못했는데… 걔 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그다음에 뭐라 뭐라 떠들어댔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나 역시 많은 고민과 열등감 속에서 20대를 보냈다. 그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는 없었을까.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다. 아직도 내 메일함에는 동기가 보낸 메일 한 통이 자리한다. 당시 유행하던 신조어와 이모티콘으로 친근함을 표시하는 녀석이 살갑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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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그 이후 만난 사회 친구다. 사는 곳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달랐지만 우리에겐 비슷한 관심사와 취향이 있었다. 페이스북이 첫 인연이 됐지만 우리는 곧잘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었고 문학이나 영화 이야기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난 J를 짝사랑했고 J는 내가 친오빠 같다고 했다. 흰머리 나고 지팡이 짚을 때까지 친하게 지내자, 오빠. 그때는 우리 가까운 데서 살자. 자주 보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 J가 미웠고 그래서 나는 연락을 끊었다가 다시 연락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연락을 몇 개월가량 끊었던 어느 겨울, 페이스북 친구의 계정에서 이상한 글을 발견했다. J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는 행복하길. 이후 그 친구에게 들어보니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고 스스로 선택했다 한다. 소설을 쓰고 싶어 했고 고양이를 좋아했던 J는 겉으로는 털털해 보여도 실은 누구보다 여린 아이였다. 그와 페이스북에서 나눈 대화들은 물론 내게 보내준 녀석의 습작 소설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우울증에 시달린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그의 일상은 꿈과 현실이 혼재하는 공간이다. J의 팔뚝(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에는 ‘La dolce vita’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근심 걱정 없는 삶. 달콤한 생. 우리가 꿈꾸던 그 세계. 너에게 묻는다. 네가 있는 그곳에는 근심 걱정이 더는 없는지, 가끔 내 생각을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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