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시간 망치질(조율핀에 해머를 꽂고 돌리는 일)을 하며 건반을 때리다 보면 귀(청력)에 마비가 오고 허리에 급성 디스크가 오는 기분. 그러다 보면 “아 몰라 이 정도면 괜찮을지도” 어느 순간 타성에 젖는 기분이 든다. (고작 두 시간 만에?) 이 음이 높은 상태인지 낮은 상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순간이 온다는 말이다. 눈에 뵈는 게 없듯 귀에 들리는 게 없는, 한마디로 위아래가 없어지는 순간. 당연하게도 그러면 조율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을 것.
그 순간이다.
내가 피아노의 모든 사각지대를 돌며 다양한 각도에서 소리를 들으려는 순간이.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다. 잠시 쉬는 것도 좋고.
그러다 이 놈의 고질병인 ‘생각하기’는 다시 발동한다.
타성에 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된 가수가 자신의 공연 셋 리스트를 수년째 변경하지 않는 것. 배우의 연기가 매번 똑같으며 새로운 변화에 인색해 보이는 것. 청소를 담쌓고 사는 지저분한 외관의 오래된 식당, 그리고 기분 나쁘게 끈적이는 테이블. 간판의 불빛 하나가 소멸해도 새로 정비하지 않고 그대로 세월을 보내는 상점.
적당히, 이렇게 살아도 언제나처럼 살아지니까 변화를 꾀하지 않는 것.
나는 살아지니까 살아가는 것이라는 기분이 싫다. 뭐라도 하고 싶어. 가다가 길이 막히면 그 길을 뚫고 싶어. 장애물이 생기면 그 장애물을 치우고 싶어. 고장 나면 고치고 싶고, 쓰러진 모든 것을 일으켜 세우고 싶어.
그렇게 잡념들로 시간을 보내거나 방법을 모색하다 보면 어느 정도 타성에 젖었던 내 귀도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이제, 위아래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착수 돌입,
다시는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