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소풍을 간 곳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때 타고 가던 버스 안에서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결과가 중요한가 과정이 중요한가'
지금도 어리지만, 더 어렸을 적엔 T적 사고로 무장한 인간이었습니다. “결과가 없으면 과정이 무슨 의미인가?” “패자들의 정신승리”라며 낭만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식의 사고를 했었습니다. (그게 멋있는 줄 알고)
정확한, 혹은 희미한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으로 갑니다.
가는 길에 새똥도 맞고 바나나껍질을 밟아 자빠지기도 하고 아메리카노도 한잔 합니다.
밤이 되고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결과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은 작게 보면 목적의 끝. 크게 보면 세계의 종말입니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건넨다면
"나는 결국 그곳에 도착했어"라기보다 "오는 길에 새똥도 맞고 바나나 껍질을 밟아 자빠져버렸지 뭐야"라는 이야기를 전할 것 같습니다.
왜 여행을 가면 목적지보다도 휴게소에 들를 생각에 신이 나는 것인가.
저에겐 한 사람, 인생의 남자가 있습니다.
싸워야 할 곳에서 위악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돌진하는데 그 입에선 보석 같은 이해와 위로의 말들이 시처럼 흘러나오는 남자였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들은 운이 여러분들에게 떨어졌을 때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그릇으로 나를 디자인하고 나는 좀 더 넓은 원을 캐치하고 싶어서 넙데데한 그릇이 되고 싶었고, 아니면 나는 깊숙한 뭔가에 이르기 위해서 긴 깊숙한 깊이가 있는 그릇이 되고 싶었는데, 그런데 운이 담기지 않았어. 그걸로 끝났어. 그럼 뭐죠?
여러분 박물관 가시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라고 있는데 그거 시가로 천억 좀 넘을 거예요. 그 안에 누가 뭐 넣는 거 보셨어요? 그릇 자체만으로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운을 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 자신이 누구냐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국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지라도, 이루지 못할지라도, 걸어가는 길목에서 전리품 같은 각종 실패의 흔적이 쏟아지더라도.
더 단단하고 멋진 그릇을 빚어내기로 합니다.
그걸로, 내 인생 예술이었다 말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