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 오래된 속담은
아득한 사람의 마음을
한 뼘 잣대로 재단하려는
조급함을 멈춰 세운다.
물의 깊이는 추를 던지면 언젠가 바닥에 닿고,
수치가 확정되는 순간 질문은 소멸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던진 추는
바닥을 찾지 못한 채 유영한다.
가늠하려는 의도가 닿는 순간
마음은 이미 다른 결로 흩어지고
오직 서두르는 시선만이
닿았노라고 착각할 뿐이다.
닿지 못한 마음을 이해하려 할 때,
언어에 기대어 마음을 재려 한다.
헤아림이라는 단어 속
날카로운 눈금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내 안의 자그마한 잣대를 꺼내
타인의 광활한 진심을
마디마디 끊어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배려라는 이름을 빌려왔으나,
그 눈금이 닿는 순간
상대의 우주는
나의 낡은 기준 아래
한 뼘 공간으로 박제되고 만다.
일상의 소음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단정들을
가만히 복기해 본다.
어느 관계에서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말로
서로의 성장을 닫아걸고,
어느 갈등 앞에서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익숙한 확신으로
서로를 침묵하게 한다.
이러한 단정들은
이해의 완성이 아니라,
사실 이해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더 가깝다.
타인을 알기 위해
마땅히 들여야 할
시간과 수고를 생략한 채,
자신의 편견 속에 상대를 가두는
가장 손쉽고도 조용한 폭력이다.
속도가 미덕이 된 시대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문장을 천천히 주고받던
오래된 대화법을 떠올려 본다.
서로의 운율에 기대어
조심스레 진심을 얹어 보내던
옛사람들의 문답은 그러했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 문장은
늘 완결이 아닌 여백으로 끝났고,
그 틈을 메우는 것은
온전히 상대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오만이 아니라,
다 알 수 없기에 말을 아끼는
유예의 태도에 가까웠다.
이러한 머뭇거림의 미학이 사라진 자리에
성급한 확신이 들어선다.
타인의 마음을 단번에 읽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궁예의 관심법이 대표적이다.
그가 내뱉은
마구니가 끼었구나라는 선언은
이해를 위한 질문이 아니라,
상대를 규정해버리는 종결의 판결이었다.
바다의 깊이를 재는 추는
바닥에 닿으면 소임을 다하지만,
사람의 마음으로 던진 추는
결코 바닥에 닿을 수 없다.
닿았다고 믿는 그 섣부른 확신이
결국 상대를 이해의 대상이 아닌,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배제의 확신 앞에,
평생 성찰에 머물렀던 퇴계 이황은
머뭇거리는 쪽을 택한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거늘,
어찌 남의 마음을 알겠는가.
성인이라 불린 이의 이 고백은
지혜의 부족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으려는
가장 깊은 예의였다.
그는 마음 앞에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남겨두며,
모르는 상태를
서둘러 끝내지 않는 용기를 보였다.
그 머뭇거림은 결국
상대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 이해의 가능성 안에 놓이게 했다.
진정한 헤아림은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끝내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기꺼이 견디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나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누군가 너무 쉽게 정의 내려버릴 때의
그 폐쇄감을 기억한다.
그 서늘한 경험을 떠올린다면,
타인의 마음 앞에 세운 잣대의 눈금은
조금 더 느리고 무뎌질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메신저 창 위로 문장을 고르다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확신의 마침표를 찍으려다
가만히 지우고 줄을 바꿔 여백을 만든다.
문장은 미완으로 흐르지만,
그 행간에 상대가 숨 쉴 자리가 생겨난다.
마침표의 오만을 거두고
물음표의 자리를 남겨두는 일.
다 안다는 듯 짓던 확신의 표정을 내려놓고,
퇴계처럼 기꺼이 미궁에 머무는 일.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정중하고 오래 남는 여백의 태도.
이해는 눈금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워둔 여백의 너비만큼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