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밤
맞은편에 윤서는 웃을 때마다 입술이 크게 벌어졌고,
그 사이로 반짝이는 치아와 함께 단호한 에너지가 풍겨났다.
손짓은 숨김이 없었고
말 끝마다 상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시원한 웃음 뒤에 더욱 대담하게 드러나는 그녀의 입술 곡선을 따라가다
이따금 그녀의 이야기를 놓치곤 했다.
한참 전부터 내가 말을 고르기 전에
그녀가 이미 방향을 잡고 대화를 끌고 가고 있었다.
이 여자와 마주하고
한 번쯤 그녀를 마음에 두지 않았을 남자는 없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그 순간을 지나며 그녀를 감상하고 있었다.
“어떤 데는 아예 연애 금지 조항을 넣은 크루도 있고
자기들끼리 사귀다가 분위기 이상하게 만드는 곳도 있고,
그래도 여긴 드러난 금지 조항이 별로 없어요.
애들도 아니고, 알아서 하는 거니까.”
막 입문한 초짜에게 러닝크루의 여러 폐해를 알려주던 중 멤버 간 연애 쪽으로 주제가 좁혀졌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이쪽으로 방향을 튼 저의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내가 그 신호를 놓치지 않기를 바랐다.
“본인이 그 소동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나 처음 나온 날도 사람들이 엄청 쳐다보던데, 당연히 남자들이.”
“알죠. 눈도 자주 마주치고.
그런데 꼭 그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관심이 생길 수 있잖아요.
그러다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윤서가 말을 끝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말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내가 모르는 세상의 문법이 있었다.
잔을 비우는 동작이 괜히 도발처럼 보였다.
“아는구나.
그렇게 시선을 받아 놓고 몰랐다고 하면 진짜 재수 없어지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데 누군가는 피해의식을 가질지 몰라요.”
“그럼, 남들 기분까지 생각해서
나는 옷을 예쁘게도 입지도 못하는 거예요?
적당히 야해야 예쁜 건데.”
윤서가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웃었다.
어떤 게 잔펀치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내 앞의 선수가 참 현란하다.
불시에 파도 같은 주먹이 몰아칠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면 민호 씨,
내가 그렇게 시선 받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었어요?
말이라도 걸지.
난 먼저 민호 씨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잖아요?”
지금 제법 큰 거 한방이 들어온 건가?
궤적이 모호하긴 했지만,
여기서는 답을 신중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 주먹을 슬쩍 흘렸다.
“차범근이라는 축구선수 들어봤죠?
옛날 사람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알 나이잖아요?
그분이 그랬대요.
이렇게 쉬운 걸 왜 안 넣어? 응?
있잖아요… 우리는, 못 넣는 거예요.”
잠시 멈춘 뒤, 윤서는 스스로를 가리키듯 덧붙였다.
“와, 내가 나도 모르게 위화감을 형성하는 불편한 여자가 되었군요.”
난 잔을 들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인정해요. 마셔요! 내 죄를 사해주세요.”
난 그녀가 열어젖힌 창에 여백을 채워나가야 했다.
딱 필요한 만큼의 잔붓질을 해가면서
이 그림을 완성하고 싶어졌다.
포만감 위에 술잔이 오가며 몸도 느슨해지고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빠른 리듬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려고 하는데,
너무 노련해 보여도 점수를 잃거든요.
남자들이 그걸 알아야 해요.”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민호가 맞장구쳤다.
“지금 윤서 씨도 자연스러운 정도라기엔 꽤 속도감이 있으십니다.”
“맞아요, 특별한 상황이에요.
사람들이 많이 하는 거짓말,
‘나 이런 적 처음이에요.’”
“제가 잘생겼습니까?
누구라도 첫눈에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가진 거라곤 얼굴뿐인 남자였나, 내가?”
윤서가 다시 활짝 웃었다.
한 번씩 터져 나오는 그 웃음은
테이블 위를 흔드는 너울 같았다.
“민호 씨, 다른 사람들이랑은 리듬이 달라요.
그래서 눈에 띄었어요.
달리기 잘 못하는 것도 이상하게,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여서. 흐흐흐.”
내가 모자라다는 말에 나는 잘도 웃고 있었다.
“보통 이상하고 부족한 것에 눈길을 주시나 봐요.
아마도 난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겠군요.”
“저는 그 ‘이상함’이 좋아요.
너무 딱 맞아버리면 재미없잖아.
내가 오늘 작두 좀 탈 것 같은데,
우리 아마 더 가까워질 거예요. 아주.”
난 눈을 가늘게 뜨며 받아쳤다.
“확실히… 이러는 게 처음은 아닌 것 같아요.”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진짜 처음이라고.
그냥 나는 모든 게 능숙해 보일 뿐이에요.
습관이 돼버린 거야.”
윤서는 손끝으로 소주잔을 굴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거나 안 먹어요.”
“음… 라면은 아무거나인가요?”
“글쎄요.
영양적으로야 가치가 없다고도 하는데,
또 그렇지만은 않죠.
라면을 두고 이루어진 역사가 많잖아요.
갑자기 웬 라면?
아! 우리 조금 더 있다가 라면 먹어요.”
템포가 빨라져도 그녀의 단어들은 흘리지 않고
전부 배달됐다.
“그렇죠? 세상에 나쁜 라면은 없는 거죠?
그럽시다.
조금 더 있으면 라면 먹기 딱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아요.”
그녀가 자기 얘기를 길게 이어가도,
내가 동참한 대화 중 잠시 스며드는 공백마저도
불편하지 않았다.
문득 군대에 있을 때,
혼자 좋아했던 대학 동기 여자아이에게 편지를 쓰며 적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이곳의 시간은 참 무겁다. 벌써 보고 싶구나.’
그런데 지금의 이 기분은 뭘까?
이 순간에 갇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변화산에서 예수와 함께한 베드로가 그랬듯
나 역시 이 자리에 초막을 짓고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잔에 남은 술은 이미 맛을 잃고,
썰어 놓은 레몬도 말라버렸다.
녹아버린 얼음통에 몇 점의 얼음 조각이 부유했고,
테이블 위에 흩어진 말들은 어느새 힘을 잃어
서로의 눈빛에만 매달렸다.
윤서는 잔을 손끝으로 굴리다 멈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언의 시간이 조금 오래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지는 침묵 속에도
교환되는 숨결과 시선이 고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11시가 다 되어 가는 걸 보니
술집에 들어온 지 두 시간이 넘어섰다.
잔이 오갈수록 우리 둘의 취기가 짙어졌다.
윤서가 따라준 맥주잔 위의 거품은 이미 사라졌지만,
내 시선은 그 잔에 오래 머물렀다.
자기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그녀의 동작은
무심한 듯 보였지만 그 안에서 나는 일종의 질서를 느꼈다.
그 리듬을 눈으로 따라가며 내 호흡도 안정되었다.
그녀가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조금요.”
평범한 물음과 대답에
내 마음은 고요한 물결처럼 흔들렸다.
“라면 먹으러 가요.”
정적 속에 쌓이고 또 쌓인 기운이,
마침내 문밖으로 우리를 떠밀고 있었다.
때가 되어 도착한 또렷한 초대장을
난 가만히 받아들였다.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나는 따라 일어서며
이 밤이 어디로 흘러갈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