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의 속도
주중 저녁이라면 한결 한산할 줄 알았다.
그러나 반포대교 아래 집결지에는 이미 수십 명의 러너들이 모여 있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크루를 선택하고 주말을 피해 시간을 잡은 것이 무색하게,
이곳은 서늘한 가을밤의 강변과 전혀 다른 온도를 품고 있었다.
나는 강변을 따라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타이트한 레깅스, 번쩍이는 러닝화, 브랜드 로고가 반사되는 운동복.
그들은 모두 제각기 자신을 전시하고 있었다.
러닝 크루는 이미 하나의 문화였다.
어디서든 무리 지어 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이제 그 무리 속에 끼어 있는 나는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건 호감이 아닌 불편한 기류였다.
저 세대가 겪는 상실과 피로를 감지할 수밖에 없는 나에겐,
무리의 활기가 오히려 경직된 표정처럼 느껴졌다.
슬림한 바디라인을 자랑하는 여자들, 구겨지지 않은 티셔츠,
미묘하게 차가운 얼굴.
그들은 굳이 웃지 않아도 중심에 있었다.
시선이 돌고 돌아 그들 주변으로 모였다.
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서로를 가늠하고 서열을 정하는 의식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나는 ‘여긴 뭐 하는 곳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잠시 객석에서 바라보듯 서 있었다.
변두리에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 경계에서만 감지되는 공기의 결이
이토록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달릴 차례였다.
이 목적과 관계없는 생각은 그만두자고 마음먹었다.
출발 시각이 다가오자 나는 사람들 틈으로 걸어갔다.
그때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여럿 속에 섞여 있었지만 일행은 없어 보였다.
누구와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그저 발목을 툭툭 굴리고 있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를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저 사람이 여왕벌이겠구나.’
군중 속에서도 윤서는 단번에 구별됐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만은 자연스레 긴장을 다스리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그녀의 머리칼을 따라 미끄러졌다.
나는 그 움직임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윤서는 원래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과장도 의식적인 몸짓도 없었다.
가만히 서서 주변을 조용히 밝히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탁한 기운을 밀어내는 힘이 있었다.
어깨를 곧게 세운 자세, 숨 고르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술.
그 사소한 것들이 화려한 꾸밈보다 더 강한 긴장을 일으켰다.
나는 그 긴장을 ‘관능’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호각 소리 하나 없이 무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광빛 신발, 흔들리는 팔꿈치들이 기류를 형성했다.
발소리가 다리 밑 트랙을 두드리며 일정한 박자를 만들었고 음악이 없는 대신,
겹쳐진 숨소리와 발걸음이 묵직한 리듬이 되어 강둑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었다.
여럿과 호흡을 맞추며 달리는 일.
내 호흡이 타인에게 닿아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한강변의 바람이 볼을 스쳤다.
얼굴을 후려치는 강풍도 반가웠다.
물 위에는 다리 난간의 조명이 부서져 흩어졌다.
달리는 각도마다 강물의 표정이 달라졌다.
노란 불빛은 술 취한 웃음 같았고,
푸른 것은 오래된 기억처럼 멀게 반짝였다.
나는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두리번거렸다.
앞질러 가는 어깨, 땀에 젖은 셔츠,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까지 모든 게 낯설고 새로웠다.
달리기보다 풍경을 씹어 삼키고
마음속에서 다시 뱉어내는 데 더 집중했다.
‘이걸 하러 나온 건데, 쓸데없이 재단이나 하고 있었구나.’
그제야 나에게 작은 일침이 들어왔다.
이제 달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만만한 구간이 지나가고 콧노래도 사그라들었다
먼저 폐가 비명을 질렀다.
호흡이 흐트러지며 앞으로의 거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 불안이 밀려왔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식견이 아니라 근육과 폐활량이었다.
의지로는 이겨낼 수 없다는 걸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다리가 점점 굳어가고
일정하던 속도가 한순간 무너졌다.
하나둘 나를 앞질러갔다.
멈춰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옆에서 청량한 냄새와 함께 발걸음 하나가 속도를 맞췄다.
힘들이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보폭.
여성 크루였다.
시야 끝으로 흘러 들어온 옆모습이 ‘맙소사’ 여왕벌이었다.
땀에 절은 나와 달리 그녀는 다른 대기의 존재였다.
날갯짓은 힘찼고 위엄이 있었다.
나를 지나쳤지만 멀리 달아나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다.
‘지금처럼 혼자 있고 싶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혼잣말이 목구멍을 스쳤다.
그녀는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페이스를 지켜주듯, 일정한 속도로 곁을 유지했다.
이 상황이 계속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 무리와 떨어져
둘만 남은 3미터 남짓의 공간을 지켜내고 싶었다.
정신력을 믿지 않던 내 다리에
고통이 서서히 잦아드는 걸 느꼈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의 리듬에 맞췄다.
이제 나의 결승선은 그녀였다.
그녀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내가 닿지 못한 강인함의 형상이었다.
목덜미에서 어깨선으로 이어지는 윤곽,
단단히 묶은 포니테일이 리듬을 타며 흔들릴 때마다
내 호흡도 그 속도에 맞춰 조율됐다.
그 뒷모습은 매혹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앞서가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낙오했어야 할 지점을 넘어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숨이 가쁘면서도 발걸음을 무너뜨리지 않게 했다.
나는 눈앞의 리듬을 흉내 내며 뛰었다.
반 박자 늦은 걸음이 내 호흡을 잡아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동행이었다.
여왕벌의 바로 옆,
그 곁을 허락받은 듯한 긴장감.
그녀의 호위무사가 된 듯한 착각.
그 용맹함이 내 몸을 이끌었다.
나는 끝내 첫 레이스를 완주했다.
숨이 타들어갔고, 폐가 뒤집히는 듯했지만
오래 잊고 있던 성취감이 되살아났다.
그 기운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남아 있었다.
나는 늘 체력보다 의지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의지가 내 몸을 깨웠다.
그 밤, 나는 처음으로 나의 속도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