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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나그네 Nov 05. 2018

구겨진 메모지

얄궂다.

아름다웠던 시절은 지나고 화려한 육체도 주름살로 가득하다. 허리 펴고 곧게 살던 시절은 어느새 추억의 언저리에 묻혔다. 아마도 구겨짐 속에는 그 추억의 이야기들이 숨겨져 여전히 미세한 숨만 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나를, 측은하게 보는 그들에게 말한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단지 구겨져 본래의 모습만을 잃었을 뿐이다. 그러니 불쌍타라는 눈길은 거두어라."

내 안에 말 못 할 사연들이 무수히 많다. 이대로 끝난다면 좋아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구겨진 틈 사이로 숨겨진 글과 말들이 웅크리고만 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안도의 한 숨을 내뱉고 있다. 그들이 승리했으리라는 착각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가끔은 구겨진 내 모습이 바람결에 흔들릴 때면 감추어진 내면의 목소리가 들쳐진다. 잠깐 노출된 도형과 글이 많은 내용을 유추하게 만든다. 나를 노출하면 흔들리는 눈동자들이 내 심장부로 태클 걸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 모른다.


노란 메모지가 온통 노란색으로 도배되어 있으리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내 안에는 시뻘건 선율의 울컥이는 생명줄이 숨 쉰다. 그 생명줄만은 건드리지 마라.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고 짧막한 비명을 지른 이들을 기억해라.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 안에 있을 지 모를일이다.


살짝 보인 틈 사이로 선과 선은 끊어져 있고 글은 반토막이 나 있고 엉거주춤하게 안정을 취하려는 자세가 요가의 고행 자세로도 비추인다. 구겨짐이 누군가에 의해 다시 펴지고 다림질되더라도 주름의 흔적은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다시 새 생명의 기운을 받던 아니면 소각장으로 향하던 메모지의 삶은 온전히 산 것이다. 누군가에게 노란색 빈 공간을 채워지도록 허락했으니 말이다.


오래 기억되기보다는 짧게라도 온전히 도움이 되었으면 만족하련다. 이것으로 족하다. 그러니 두려워말라. 나 또한 기억 저편으로 스르르 잠들 테니...

얄궂은 인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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