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태블릿 창은 순백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하얀 백지 위를 내달릴 적토마를 상상하지만, 현실은 말 그림자도 그리지 못한다. 그저 하얀 창을 바라만 보는 것뿐. 빈 땅을 그냥 두지 못하고 무언가를 세우려 한다. 그냥 두면 자연스러운 미를 뽐낼 수 있으련만. 만들고 세우려는 욕구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하얀 창도 그냥 두지 못한다.
그 위에 나만의 수채화로 뽐내고 싶고, 멋들어진 시구를 뽑고, 말발굽 소리를 내며 글자로 도배하고 싶다. 말이 달리듯 글도 달려서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고 태평양 심해를 항해하고 태양계를 맴돌고 싶다. 그러다 보면 하얀 백지는 형형색색의 색채와 시 그리고 글로 채워져 비움이 채움의 아름다움으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비웠을 때의 아름다움과 채움으로서의 아름다움. 나는 어느 것을 더 선호할까?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 없고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사람의 욕심을 지우는 데는 비움이 더 나으려나?
결국 비움을 선택한다면,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시베리아 벌판도 태평양 심해도 그리고 태양계도 상상의 말 달림일 뿐. 여전히 태블릿 창은 순백의 아름다움 그 자체로 빛나고 있다.
늦은 밤이 어느새 새하얀 낮이 되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