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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Jun 02. 2021

냄새

 해가 좋은 날입니다. 시간이 참 잘도 가지요. 당신은 어떤 수요일을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 저는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겨우 챙겨 먹고 여기 앞에 앉았습니다. 꽤 어수선한 책상을 먼저 정리할까 싶었는데 오늘은 이런 상태가 좋아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바라본 창문 밖에는 아파트 공사장이 보여요. 참 낭만도 없지요. 제가 앉은자리에서는 하늘 한 점 볼 수 없을 정도 높이와 폭을 가진 건물이 보입니다. 밤에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거나, 짧은 산책을 나가는 길이면 공사장의 모래 냄새가 KF94 마스크를 뚫고 슬며시 들어와요. 다행히 지독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밤 냄새와 섞여 제법 괜찮은 냄새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보니 공사장도 나름의 낭만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제가 밤 냄새를 사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냄새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감기 때문에 코가 막혀도 기억이 담긴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지지요. 저는 주로 단어와 냄새로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단어보다는 냄새가 더욱 강력하게 기억을 이끌어내요. 프루스트 현상이라고도 합니다. 냄새를 통해 기억을 이끌어내는 것. 어느 날 맡았던 비 냄새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걷던 날의 기억을, 어느 날 맡았던 햇빛 냄새는 사랑하는 사람의 살에 코를 묻고 안겨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종종 아주 어린 날, 무의식에만 묻혀있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하지요. 분식집의 떡볶이 냄새, 운동장의 흙냄새, 어린아이들의 땀냄새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반면 아주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해요.


 기억이란 것이 참 신기합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떠올리면 그때만큼 설레기도 하고 그때만큼 슬프고 아프기도 하니까요. 저는 요즘 쓸쓸함의 냄새를 자주 맡습니다. 혹은 외로움의 냄새를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는 다행히 그 사람의 향기에 젖어있느라 쓸쓸하고 외로운 냄새를 덜 느끼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는 아주 지독하게 고독의 냄새에 취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우울의 증상일까요. 쓸쓸함과 외로움의 냄새는 아주 공허한 고독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속을 답답하게 만들고, 안 좋은 기억들을 모두 불러일으키지요. 말에 상처 받았던 때와 눈빛에 상처 받았던 때를 기억하게 해요.


 어릴 적, 모진 말을 많이 듣던 때가 자주 기억납니다. 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상대는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했던 것인지,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때가 있어요. 저도 화가 많은 사람이기에 대충 미루어보아 상대는 나에게 화가 많이 났었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는 않습니다. 말에 베인 상처는 흉이 지거나 흉이 질 틈도 없이 상처가 자꾸만 벌어져 덧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들이 귓전과 코끝을 맴돌면서 저를 괴롭히는 요즘입니다. 뾰족한 말들이 저와 세상의 사이에 단단한 벽을 만들어 저를 가두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세상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의 냄새를 아시나요? 어우러지는 밤 냄새도 없이 습하기만 한 모래 냄새와 닮은 그 냄새를.


 우울의 냄새는 아주 희미하면서도 그 영향력은 제법 큽니다. 우울이라는 감정 자체가 이미 강력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희미한 정도의 냄새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 대에 힘들었던 기억을 이십 대가 되고 국가가 공인한 어른이 되면 금세 툭툭 털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떠올리면 그저 어린 날의 패기였다고 여겨지네요. 이십 대의 끝자락에도 그 냄새가 나면 꼼짝없이 갇혀버리고 말아 버리니, 패기 있던 이십 대 초반의 저에게 아주 미안해집니다. 계획했던 멋진 어른이 되지 못해서 말이에요.


 냄새로부터 자유로운 어른들은 얼마나 될까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던 때의 냄새와 두 번 다시 꺼내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의 냄새로부터 자유로울 어른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어른은 오히려 어른이라 더욱 고달픈지도 모릅니다. 아픈 기억에서 헤매고 있더라도 그렇지 않은 척 해야할 때가 많으니까요.


 때로는 슬픔과 아픔의 냄새로부터 자유로워 지기 위해 숨을 아껴 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냄새는 눈물의 냄새가 되어 돌아오더군요. 그러니 되도록이면 냄새가 맡아질 때에는 크게, 더 크게 냄새를 맡아버리세요. 기억에 해로운 냄새가 코를 찌를 때에는 들이쉬는 숨을 두 번에 나누어 들이쉬고, 크게 한 번에 내뱉어버리면 조금 진정이 됩니다. 그런 냄새는 맡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살다 보면 꼭 한 번씩 마주쳐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이 방법이 당신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께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으니 쓸쓸함의 냄새가 조금 걷힌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울과 쓸쓸함과 외로움의 냄새는 기분이 불러내는 냄새일 수도 있겠군요. 아무쪼록 당신은 오래도록 이 냄새는 잊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기억과 아련한 기억만을 담은 향기 속에서 지내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저는 내일 다시 편지하도록 할게요. 좋은 하루가 되셨기를 바라겠습니다.


21. 06. 02. 물. 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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