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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Nov 29. 2018

오글오글

  '오글거린다'라는 말이 숨 쉬는 것만큼 잦은 횟수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은 느끼한 말과 더불어 진지하거나 문학적이고 감성적인 말을 만나면 너 나할 것 없이 무조건 '으, 오글거려'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웅크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도 나는 예스러운 말투를 좋아했다. 특히 시대극에 나오는 말투는 정말 멋있었다. 나긋나긋하고 때론 강단 있게 느껴지며 웃으면서 말하면 비단결보다 보드라운 말투, 언성을 조금만 높이면 결단력 있는 말투.


 그렇다고 21세기를 사는 내가 친구들에게 '뭐하고 계시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말투이고 싶어서 다정하고 싶을 때는 경상도 토박이지만 때때로 '~했니?' 하는 말투를 쓰곤 했다. 그러면 내 말투는 경상도도 아니고 서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주도도 아닌 독특한 말씨가 되어있었다. 그런 말투로 한껏 다정한 기분을 내고나면 열의 다섯은 이랬다.


 "말투가 왜그래?ㅋㅋㅋ"

 "말투 진짜 특이해."

 "할머니같아."


  지금도 이따금 그런 말을 듣는다. 자주 듣는 말이라 이젠 그러려니 한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말의 모양새를 바꾸고 싶지는 않다. 난 후천적 무뚝뚝함을 빼면 논할 수 없는 사람인지라 매 순간 나긋나긋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20여 년째 노력하느라 애를 먹는 중이다. 어떤 날, 애를 너무 써서 포기하고싶어질 때 나는 종종 다정할 때의 말투가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도 좀 우스운 말이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묻지도 않고 사랑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사랑에 빠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포기를 미루곤 한다.


  새해가 되면 늘 수십 가지의 계획을 세우지만 내년에는 소리 높이지 않고 화내는 방법과 조곤조곤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온화한 미소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안하무인인 사람을 꺾는 모습만큼 강한 모습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 두고 오래 본 적이 없어서 나 홀로 배우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그래도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니 또 애를 먹으며 노력해 보려고 한다.


  일상에서 잔뜩 굳어있다가도 '낭만 있다'라던지, '사랑해'라던지,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같은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마음처럼 가뿐하게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표현하려고는 한다. 누군가 내게 그런 감성 그득 담긴 말을 건네준다면 난 당분간은 그것을 동력 삼아 살아낼 수 있으니까,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어느 누군가도 그 말로 하루 길게는 며칠을 살아내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옛 말씨를 좋아하는 내 취향은 강산이 수백 번 변해도 바뀌지 않을 테다.


  인터넷과 학교가 나의 온 세상이었던 시절에서 벗어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조금씩 내가 지향하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내고 있다. 일상에서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고, 담담하고 간혹 불처럼 화를 내며 나도 모르게 우렁찬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지난 20여 년 간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면밀히 뜯어보자면 고등학교 때 보다 자극적인 말은 덜 하려 노력하고 있고(아마도), 떠오르는 심상을 붙잡아 글로 풀어내며 예쁜 단어를 모으고 있다. 편지 쓰는 일은 여전히 즐기며 좀 더 보들보들한 말들을 제한된 편지지 안에 담아내려 하고 있다. 어쨌든 나는 어릴 때보다는 '말'로 살아보려 애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약 한 달 후에는 오글오글 말고 간질간질한 말을 잘 쓰는 내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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