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름 Dec 28. 2018

그만 열심히 해도 돼

  남이 갉아먹은 자존감도 회복이 어렵지만 내가 갉아먹는 자존감은 회복의 방도가 없다. 옆에서 누군가 꾸준히 용기를 북돋아주거나 기막힌 우연으로 어떠한 성과가 눈에 보이기까지는 상당히 더디게 새살이 돋는다. 무기력해지기 시작하면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기분전환을 위한 취미랍시고 벌여놓은 일도 슬럼프에 빠질 때면 무용해진다.


  초가을 무렵부터 꾸준한 주기로 나를 찾아온 슬럼프는 초겨울까지 나를 우울하게 하더니 결국은 나를 바닥에 퍼질러 눕게 했다. 방의 불은 여느 때보다도 일찍 꺼졌고, 넘어가는 책장 수도 현저히 줄었으며 쓰는 글자 수도 줄어갔다. 재미없는 일상의 반복에 지루해지던 중이었다. 그나마 의욕 있게 하던 일은 휴대폰을 붙들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방에 불을 모두 끄고 인스타그램 피드를 반쯤 풀린 눈으로 훑다가 '글배우' 작가의 공지글을 보게 되었다. 페이스북에서부터 꽤 오랫동안 그의 글을 보았는데, 그가 꽤 가까운 곳에서 강연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강연 주제는 <자존감을 높이는 마음 수업>. 강연이 있을 장소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지하철을 타고 30분가량 가야 하는 곳이었다. 다른 때라면 춥고 귀찮으니 넘기자 했을 나였다. 나는 원래 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날 밤은 홀린 듯이 강연 접수를 끝냈다.


  강연이 있던 12월 7일 금요일은 칼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칼퇴근 후 부리나케 지하철을 타고 강연 장소로 향했다. 퇴근 전부터 고프던 배는 강연 장소에 도착하니 곧 꼬르륵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저녁으로 먹을 메뉴를 생각하며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 후기의 결말을 말하자면 나는 그의 강연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뿐 아니라 위로를 받았었다. 낯선 이의 무조건적 위로가 엄청난 기운을 북돋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나는 항상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해주는 위로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진짜 알맹이 있는 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차근차근할 말을 정리하고 때론 깊이 생각하고 자주 물을 마시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강연을 오래 해 왔던 사람답게 중간중간 무겁기 쉬운 주제를 환기시키는 재치도 보여주었다. 많은 말들이 내 생각에 차곡차곡 꿰어졌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1. 근본을 두고 현상만 바꾸려고 하지 말자.

 2. 의욕이 없고 의지가 없는 것은 지치거나 의욕을 내고 의지를 낼 대상이 없는 것이다.

     의지는 대상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의지와 의욕이 없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3. 나와 나와의 관계를 위해 애써야 한다. 힘들더라도 노력해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다 있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가보고 만나보자.


   이것 말고도 그는 많은 말을 나눠주었다. 그의 힘들었던 한 때와 꺼내기 힘들 법한 일들을 힘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모습에서 난 또 위로를 받았다. 나만 힘들다고 느껴서 더 힘들었던 시간들이 사실 보편적인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것이, 내가 유별나게 힘든 인생은 아니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내가 세상에서 동떨어지지않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공감을 해주는 것만큼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테다. 나는 공감을 해줄 줄만 알지 내 평범한 감성으로 타인에게서 공감을 끌어내는 일은 익숙하지 못한 편이다. 그래서 그가 더 대단해 보였다. 강연이 끝난 뒤에 바쁘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엉엉 우는 꿈도 깔깔 웃는 꿈도 아닌 눈물 몇 방울과 마음이 녹는 꿈. 나는 순식간에 전한 힘을 내지는 못했지만 천천히 회복해갔다. 병원에서 나와 잘 맞는 의사 선생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의 위로대로 나는 이미 열심히 살고 있었고 강연을 들은 후로도 열심히 살아냈다.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더 닦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무사히 2018년 끝자락까지 온 나를 좀 대견해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올 해는 생각만 열심히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언가 해보려고 몸을 움직였던 한 해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2019년이 찾아오면 이 에세이는 잠시 멈출 것이다. 다른 무언가를 위해. 그걸 해내고 나서 내가 다시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다시 사소한 에세이를 쓸 때쯤에는 글쓰기에 조금 더 능숙한 사람이 되어있다면,  좀 더 글감이 풍부해지는 2019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면서 울고 웃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