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노아 Mar 25. 2020

비밀 하나 알려줄까?

몰입

줄리안 반스의 책 "Levels of Life" 에는 열기구가 등장한다. 그의 책은 직역에 도가 튼 최세희 번역에 의존하는데 제목만큼은 출판사 입김이 작용한 모양이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로 번역했다.  

이 책에서 반스는 열기구에 관해 해박한 정보를 쏟아낸다.  이쯤 되면 제목의 번역이 어울리지 않다는 것(나는 제목을 보고 그의 아내 죽음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을 독자는 금방 눈치챈다.

열기구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며 읽어 내려가다 흥미로운 대목에 도착했다.


기구 주위의 대기를 짓누르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공기는 들이마시기에 가볍고 청량했다. 나의 영혼도 고양되었다. 잠시나마 편지도 우체국도 근심도 없고, 무엇보다 전보에서 해방된 곳에 있게 되어 즐거웠다. pp26


열기구 풍선이 '지고한 자유의 상징'이라고 표현한다. 이 부분을 읽다가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가 풍선을 타고 싶었다.  국내의 열기구부터 해외 열기구까지 탐색을 시작했다.


이런,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나는 상상을 이용해 자주 여행을 다닌다.  평소 뇌를 그렇게 길들여서 그런지 몰라도 상상력과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렇다 보니 골프 라운딩 18홀 전부, 매 홀마다 샷을 다 기억한다. "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나는 다음 홀가면 지난 홀 다 까먹는데" 이런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팡을 악보 없이 한 시간 가량 쉬지 않고 연주할 때 난 더 놀란다. 상상력과 기억력, 이 두 가지 기술 덕분에 집중력만 좀 더하면 나는 영화든 책이든 주인공 안으로 들어가 그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가장 재미있게 가상현실에 몰입해 재미를 느낀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 Gravity다.  영화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다.


지구 상공 600km, 기온은 125℃와 영하 100℃를 오르내린다. 매개체가 없어 소리도 없으며, 기압도,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 생존은 불가능하다.”


나는 영화 보는 내내 주인공이 되어 우주를 만끽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총성을 듣고 마음이 답답할 때는 우주로 떠난다. 영상의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상태가 되면 그 기분은 형언하기 곤란하다. 책에서도 종이를 찢고 작가가 묘사한 장면 속으로 들어간다.


작가가 글을 쓰며 연상한 뇌의 상상을 좇는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상상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 상세한 장면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건의 각색일 경우가 많다. 그래야 그 상상을  생생하게 옮길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은 대부분 작가가 경험한 세상이 가상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 듯 보인다.


내가 말하고 싶은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상상에 몰입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작품에 몰입해 원하는 작품 속 그가 되어 장비 없이 가상현실 virtual reality을 느끼는 것이다. 요즘같이 방콕에 갇혀 오갈 때 없는 수감생활 상황에 아주 효과적인 방법인 셈이다. 사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재난에 갇혀버린 코로나보다 무서운 일상의 파괴 때문이다. 그냥 갇혀만 지내면 감지덕지다. 이 와중에 길거리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근로자나 업체를 유지해야 하는 중소상인들을 생각하면 그들은 파괴된 일상부터 정신적 통증까지 감내해야 한다. 그 아픔은 전쟁터에서 총탄에 맞아 흩어진 신체의 일부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절규하는 병사와 같다. 머릿속에는 집에 두고 온 가족 얼굴이 하나씩 떠오르고 아주 끝나버릴 것 같은 삶에 대한 두려움은 마지막까지 악랄하게 그를 괴롭힌다. 골방에서 앞길이 막막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화장지가 떨어져 화장실이 두려운 미국의 사재기 피해자나 똑같은 상실의 아픔 앞에 서 있다.


우리가 곱씹어 생각해야 하는 몰입의 주제는 우리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삶이다.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즉 그냥 그렇게 휩쓸려 죽어갈 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다. 줄리언 반스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을 때 그가 느끼는 비탄을 "우주가 제 할 일을 했다"라고 묘사하는 것처럼 재난은 고장 난 지구가 살기 위해 토해낸 오물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야 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바이러스보다 영특한 뇌를 사용해 살아갈 이유를 발명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


직장에 나가 하루 종일 있다가 돌아오던 사람은 좁은 집안에 갇혀 사는 가족의 얼굴을 비교적 소상히 보게 된다. 아내의 얼굴에 화장으로 숨겨져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검버섯을 찾게 되고 아이들이 핸드폰에 코 박고 살며 도대체 무엇을 보고 사는지도 곁눈질로 눈여겨보아야 한다.  뉴스에 나오는 세상만 보지 말고 내 눈에 보이는 깨진 일상의 재난현장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곳엔 우리가 놓치고 살아왔던 수많은 사각지대의 사물, 현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위기 앞에 문명을 들어냈을 때 야생에 남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런 앎은 생존 위협받는 사람을 포함해 우리가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인생의 남은 시간은 저마다 다르다.  인생은 어느 날 불현듯 나에게 정지화면을 제공한다. 코로나로 죽은 사람 숫자는 통계로 표현되지만 사실 그 숫자에 내가 뽑히면 나도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지워진다.


그래서 인생은 매 순간 재미있어야 한다.


자주 쓰는 개념이지만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영웅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글과 경험을 남긴다. 미안하지만 우린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없다. 어쩌면 아프리카 세렌게티 초원에 누우 떼의 똥 한 줌 굴려 먹고사는 쇠똥구리가 조금 더 가깝다. 그래서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반스는 자기 아내가 죽고 나서 남편을 먼저 잃은 한 여인의 위로 편지를 받는다.


"중요한 건, 자연은 너무나 정확해서 정확히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 우리는 그 고통을 즐기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 점이 지금까지 문제가 안되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pp116


반스는 이 말에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눈앞에 당면한 고통은 내 노력으로 제거되기도 하지만 사실 내 노력 밖의 무수한 변수가 우리 인생에 잠재되어 있다. 길을 찾는 것은 우리 몫이지만 길이 찾아지는 것은 우리 몫 밖에 놓여 있다. 우리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떠난 대통령 노무현이 "운명이다"라고 말을 남긴 것에는 그만의 깊은 성찰이 담겨있다.            


나는 재미있게 삶을 살기 위해 몰입한다. 글을 쓸 때도 몰입하고 책을 읽을 때도 몰입한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재미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뉴스는 거의 믿지 않는다. 뉴스는 인스턴트 음식 같다. 잘 포장되어 있지만 먹어서 해롭고 먹고나도 만족스럽지 않다. 내가 재료를 고르고 찾고 직접 세상의 지식을 만들어 먹는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자주 전화를 주신다. 우리 어머니는 거꾸로 사시는가 보다 내가 걱정해야 하는데 아들이 머무는 한국, 남은 가족들이 머무는 미국, 두 나라를 걱정하신다. 귀가 안 들려 고래고래 큰 소리로 통화를 하다 묻는다.


" 요즘 책은 잘되고 있어?"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번엔 어머니가 좀 작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말씀하신다.


" 난 원고 다 끝냈어.  이미 투고했지, 상금이 500만 원이야, 전화 끊는다."


뭔지 모르지만 글짓기에 응모한 것 같다. 아무래도 저분이 나보다 더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것 같다.


오늘은 어머니 몸속에 빙의해 들어가 몰입해서 그녀의 원고를 훔쳐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문제는 마스크 아니라   경제야 바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