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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Mar 28. 2020

두 종류의 인간

책과 폰으로 구분한

스마트폰에서 빛이 나온다.


새벽에 눈이 떠져 스마트폰을 들었다.  파란빛이 까만 밤을 깨우고 나마저 확 깨운다.

새벽 3시다.  더 자야 하는데, 폰에는 브런치 글이 올라와 있고 태평양 건너 코로나 머금고 날아온

문자가 보이기를 기다린다. 이걸 보다 잠에서 완전히 깨 버렸다. 청색광 탓이다.  


나무에서 태어난 책은 아침을 민낯으로 맞이한 여인처럼 우윳빛 얼굴을 하고 있다. 책이 빛날 땐 글이 생명으로 살아 나와 교감하는 잠시 뿐 항상 수수한 얼굴로 서가에 앉아있다. 책과 폰 중 무엇을 선택하라면 둘 다 가져야 한다. 혼자 있기에는 책이 더 다정하고, 여럿이 살아가려면 폰이 더 쓸모 있다.

그래도 정말로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책을 고른다.


스마트 폰은 도시 여자 같다.  


함께 동거하며 스스로 발광하는 내 도시 여인은 넷이다.  폰/태블릿 pc/ 랩톱/ 20인치 모니터. 책상에는 스마트폰이 키보드 옆에 놓여있고 Radio swiss classic 음악이 흐르며 랩톱 화면에는 백색소음, 우주에서 라이브로 중계하는 위성이 돌고 글쓰기와 업무 하는 큰 화면이 가운데 있다. 이 루틴이 갖추어져야 일과 글의 욕망이 자극받는다. 욕구가 작동하면 글이 소나기처럼 자판에 내려오고 천둥이 뇌를 쾅쾅 치며 모니터 피뢰침에 번개처럼 글이 꽂힌다. (요즘은 천둥 번개 못 본 지 오래다)  일할 때 누가 옆에서 보면 증권회사 직원 같다. 작업을 오래 하다 보면 눈이 아프다.

나는 양쪽 눈의 시력 차가 커서 무엇이든 오래 보면 눈을 감아야 한다. 스마트 한  여인과 어울리려면 적어도 두 시간에 한 번 몸을 움직이고 눈도 감아야 한다.  그래도 그녀가 좋은 건 빠르고 정확하고 도시의 많은 정보를 머금어 그렇다. 하지만 스마트 폰 그녀는 피곤하다.

 

나무 책은 외국 여자 같다.


궁금하기도 하고 익숙하지도 않고 신비롭기도 하다.  나는 책을 만나면 겉표지부터 종이와 활자, 작업한 사람들까지 정성껏 느낀다. 그렇게 느끼다 보면 책의 출생비밀과 나무도 가끔은 생각한다.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여는 첫 페이지 작가의 첫 문장은 아이스크림 첫맛처럼 달콤하고,  탄산음료의 탁 쏘는 청량감마저 가져다준다. 책은 스마트폰처럼 들이대지 않는다. 발광도 안 할뿐더러 엉뚱한 말도 거짓 정보도 내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뿌리를 가지고 숲에 살아온 책의 몸이 그렇고  그 몸에 새겨진 글도 퇴고에 퇴고를 거쳐 편집자의 눈과 손에 붙잡혀 또다시  X Ray에서 MRI까지, 다시 태어나 사려 깊은 생각들만 새겨 놓았다.

   

책은 자연을 닮았고 폰은 문명과 닮았다.



미국의 집은 다운타운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무로 지어져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척 신기했다. 우리끼리 우스개 소리로 "미국은 가난해서 다 판잣집"이라고 까지 했다. 내가 서울을 떠나 올 때만 해도 한국은 부수고 다시 짓고 근대화, 도시화, 현대화의 바람이 불어 가난의 상징 판잣집은 사라지고 있었다.

미국 중부에 살다 서부로 여행하며 추억을 찾아 유학 때 살았던 아파트를 다시 가 보았다. 그곳은 둘째가 서너 살 때 수영장에서 익사할뻔한 곳이라 어떻게 변했는지 일부러 가보고 싶었다. 세상에나, 외벽 페인트 칠만 바뀌고 나무 아파트 그대로다. 사실 그때부터 서양인들의 오래 쓰는 문화를 알기 시작했다.

나의 처음 나무집을 구입했을 때도 천장 속에 진한 나무향을 품은 목조들이 서로 엉켜 있는 것이 신기해서 한참 바라본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나무 판잣집은 자연이 숨쉬는 좋은 집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김치도 만들 줄 안다. 솔직히 김치 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요리에 욕심이 생기고 개성 없는 조미료 김치 맛에 싫증이 나서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어제도 배추 한 포기로 맛김치를 담갔다. 집 한구석에 놓인 김치통에 좋은 균과 나쁜 균이 서로 겨루며 익어가는 중이다. 오늘 아침에는 냉장고로 들어가 차분하게 익어갈 것이다. 유산균을 포함해 최초의 좋은 균은 어디서 왔을까? 모두 자연에서 나왔다. 그래서 감자나 당근 등  뿌리채소 들은 흐르는 물에 대충 씻는다. 그 흙에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들을 먹어주기 위해, 그들이 내속에 들어와 자기 할 일을 하고 조심히 나가도록 하기 위해 그렇다. 나도 우주의 일부로 여기 잠시 머물다 언젠가 사람의 기억에서도  떠날 테니 동료의 마음으로 자연의 생명들과 교감한다.

그래서 나는 자연이 먼저고 문명은 다음이다. 책이 먼저고 스마트폰은 나중이다.



나무 같은, 책 같은  인간        

스마트 폰 없이 세상을 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인간은 스마트 기계보다 나무를 더 닮았다. 이 행성을 거쳐간 선배들 이야기도 나무에 남겨 놓았다.

스마트 폰은 인간의 전기를 먹고 살지만

인간은 나무의 산소를 먹고 산다.


인간은 둘로 나뉜다.

나무 위에  인간과 스마트폰 위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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