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직장 선배 소개로 만났다. 선배는 이번일 성사되면 크게 한턱 쏠 것을 은근히 강요하며 "진국"이라고 그녀를 소개했다. 솔직히 내 나이 서른둘에 벌써 사귄 여자만 열명도 넘고 그중에 진지한 만남도 두 번이나 있었다. 이번에도 진지해지면 세 번째 연애인데 사실 나는 "사랑"에 좀 지쳐 있었다. 사랑 증세가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감염되면 몇 달 동안 몸에 열나고 그녀가 보고 싶어 안달했다. 매일 문자에 만나면 돈도 하나 아깝지 않았다. 몇 달 아니 다음날 그런 적도 있지만 손잡고 키스라도 하면 접촉으로 인한 감염속도는 더 빨라지고 몸에 열도 더 나고 하루 종일 그녀 생각에 멍하니 빠진다.
그렇게 나는 항상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진지하게 만나던 두 여친은 잠자리도 함께 했다.
그 달콤한 생애 첫사랑에 흥분과 기대가 하늘을 찔렀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 기쁨은 두 번 다 몇 초 만에 끝나 버렸다.
지금 나는 법적으로 총각이지만 숫총각은 이제 아니다. 정말 사랑하고 결혼할 여자와 내 동정을 바치겠다는 순진한 결심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사랑은 사랑을 나누고 나면 증세가 급격히 완화됐다. 열이 내리고 이전처럼 달콤하기보다 그녀 살 냄새가 더 짙게 느껴졌다. 나도 살 냄새가 나나 하고 샤워 때마다 킁킁거려 봤지만 비누냄새가 더 났다. 첫 번째 그녀는 6개월 만나다 헤어졌고 두 번째 그녀는 2년이나 만났다. 애정은 시간이 가며 낡아지는 것이 똑같았다. 사랑 바이러스 완치받으면 정신이 돌아와 그녀가 그냥 여자 사람으로 보인다. 가족? 동생? 뭐 그런 느낌이다. 내가 그녀들과 헤어진 것은 감동이 사라진 관계를 이어갈 의미를 느끼지 못해서다. 뭐랄까 여자는 챕터 2에 지성이 좀 필요하기도 한데 아름다운 그녀들은 몸을 지나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첫 번째 그녀는 다리가 예뻤다.
내 기준은 허벅지가 튼실하고 무릎에서 발목까지 길이가 길고 발목이 가늘어야 한다. 또한 발의 볼이 넓은 오리발은 정말 질색이다. 이 기준을 통과하고 정장에 하이힐, 나는 이 지점에 오면 그녀를 무조건 사랑한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직장 선배는 "너 참 특이 하구나 무릎에서 발목까지 길이라......"
" 노우, 말 안 해서 그렇지 남자는 거의 다 여자 외모에 대한 자기 기준이 있어"
선배가 진부한 거다. 지금 선배랑 같이 사는 형수는 다리가 짧다.
내 친구는 자긴 다리에 관심 없고 뇌에 관심 있다고 했다.
지성으로 충만하고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전문직 여성이 좋다고 했다.
(얘는 아직 정신 못 차렸다.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 왜, 피아노 치는 것도 집어넣지)
난 그에게 " 흠, 너 참 특이하구나, 뇌를 좋아하신다...... 그럼 뇌는 예쁜데 비만이야 그래도 좋아?"
친구는 웃는다. " 술이나 쳐드세요"하며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녀는 얼굴이 예뻤다.
다리는 내 기준에 못 미쳤지만 키가 163cm라 하이힐 신으면 내 이상에 근접했다. 하지만 그녀가 실내에 들어가면 좀 짧아진다. 다리 기준이 무시된 이유는 얼굴이 예뻐서다. 피부는 "우. 윷. 빛. 깔. 백지영~" 같았고 얼굴은 이상적 계란형이었다. 무엇보다 눈이 아름다운 경성지색 이었다. 그녀 눈을 보고 있으면 "레드썬~" 할 때까지 점점 마취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 그녀 눈을 보며 말하는 입을 보다가 만난 지 사흘 만에 그녀 입술을 훔치고 말았다. 첫 키스는 두 번째 그녀가 더 황홀했다. 새로 만날 때마다 첫 키스라고 난 말하는데. 생애 처음 첫 키스는 정말 실망스러웠었다. 갑자기 혀가 훅 들어와 머릿속엔 좋으면서 순간 " 이 여자 혹시 키스 엄청 한 건 아닐까?" 하는 혼란 때문에 내 신경증을 건들고 생애 첫 키스는 망해 버렸다.
침대에 엎드려 오빠와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빠를 처음 만나던 날 안 하던 화장을 했다. 현관 앞 거울을 보며 "훗, 미친 " 웃었다. 내가 하이힐을 신다니 좀 미친것 같았다. 솔직히 여자 나이 스물아홉이면 결혼 적령기를 놓친 것 같아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아직 모른다. 그날 그렇게 평소보다 진하게 화장을 하고 나갔다. 나는 우리 부서 동료 미란이 다음 이쁘다. 처음에는 내가 젤 이쁘다며 탁 부장님이 삼촌처럼 다정하게 징그러운 윙크를 결재 때마다 선물했는데 요즘은 그걸 미란이한테 한다.
"야, 탁부장 좀 징그럽지 않냐?" 이 기지배가 술 한잔에 조금 취하자 나온 말이었다.
"뭐가?" "눈웃음 실실 에 마지막 윙크까지, 가자미 눈 같은 게" 훅, 마시던 술을 엎지를 뻔했다.
"처음엔 나한테 그랬어, 넌 영광인 줄 알아. 남자 직원들 결재하다 깨지는 거 몰라? 욕도 하더라 그 가자미가"
미란이가 나보다 좀 난 건 키가 5센티 더 큰 것뿐이다( 물론 얼굴이 좀 더 하얀 것도 인정한다). 그런데 그 한 끗 차이로 남자들은 그녀를 먼저 쳐다보고 다음에 나를 본다. 내가 밀린 거다. 그래서 다음부터 나는 미란이와 부쩍 가깝게 지냈다. 내가 미국 유학 때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도 예쁜 백인아이popular들과 어울리면 안전하고 돋보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 직장은 한국 최고 대기업이고 나는 대표 미녀사원 아닌가.
그날 그는 무슨 선보는 사람처럼 감색 정장에 새하얀 와이셔츠차림으로 나왔다. 내가 약속시간보다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입구가 잘 보이는 커피숍 앞자리에 앉았는데 그가 그런 차림으로 나타났다. 어차피 오늘 소개팅 주선하는 오빠가 와야 누군지 알겠지만 한눈에 바로 저 사람도 소개팅 나온 듯 보였다.
난 남자 외모보다 능력을 본다. 그 능력은 돈 버는 능력이다. 위험한 세상을 어떻게 돈 없이 살까 생각하면 캄캄하다. 부모님은 내 결혼 적령기를 앞두고 이혼했다. 지독하게 가족에게 무심하고 돈만 아는 아버지와 지독하게 섬세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엄마 사이의 동행은 이 정도면 사실 충분했다. 내 결혼만큼은 같이 치르고 헤어진다 하더니 얼마 전 둘이 협의 이혼해놓고 나한테 통보했다. 솔직히 요즘 이혼은 흉도 아닌데 부모님 이혼이 걸리면 나도 그런 놈하고 시작 안 하면 된다는 배짱으로 누구든 만났다.
그런데 가장 더러운 일은 피를 통해 아버지 "돈 사랑"이 유전자로 날아와 내 뇌에 박혀있는 것이다. 처음엔 "돈이 다가 아니죠" 하다가 마지막엔 "돈이 최고죠"하는 내 말을 들어보면 그 빌어먹을 유전자가 뇌에 완전하게 내장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진짜 말하고 싶은 내 이성적 속마음은 "세상은 돈이 다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어디야?" 카톡이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소개하는 오빠가 감색 정장 그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이 보였다. 앞에 앉은 나도 못 보고 소개하는 오빠도 나를 지나친 모양이다. "오빠? 여기" 그들이 미소를 머금고 내쪽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