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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Apr 09. 2020

우리 재혼할까요 ? I

아빠가 이혼 한지 1년이 지났다.


엄마 우리를 아빠에게 맡기고 떠나자  우리 집엔 남자 셋만 덩그러니 남았다.

할머니는 엄마 대신 우리의 늙은 엄마가 되었다. 작년에 동생과 내가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할머니는 기쁜데 우셨다. 할머니 표정은 금메달 따고 애국가 울릴 때 시상대 위의 선수 같았다. 그래서 기쁜데 우는 것은 그리 슬프지 않았다. 아빠는 아무 말씀 안 했지만  나를 허그한 압력으로 보아 내가 공부 열심히 하고 학교 잘 다니면 어른들이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엄마는 문자만 보내 주었다. 축하한다며 다음번 만날 때 졸업 선물로 갖고 싶은 것이 뭐냐고 흔한 카톡 이모티콘 하나 없는 건조한 축하를 받았다.  


엄마는 외 할아버지가 세운 사립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다.

할아버지는 교육 사업하고 있지만 집안 대대로 그냥 부자다. 그래서 엄마도 부잣집 딸이고 미국에서 1년 연수 마치고 들어와 할아버지 학교에서 일했다. 엄마는 인류 종말이 오지 않는 한 자기가 교장이 될 거라고 자주 말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비굴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것이 엄마의 오만을 싫어하는 표정인걸 좀 더 커서 알았다.


엄마는 미인이고 아빠는 훈남이다. 그래서 나도 내 동생도 키가 크고 잘생겼다.


엄만 아빠가 허우대만 멀쩡하다 놀리는데 아빠는 착하기만 하지 엄마처럼 야무지지 못했다. 아빠는 처음에 대기업 다녔는데 무슨 큰일에 엮여서 퇴직하셨다. 그때부터 엄마는 아빠랑 심하게 싸우기 시작했고 나도 그때부터 감청반 근무를 시작했다. 두 분이 싸울 때 무슨 말을 하고 누가 원인 제공자 인지  알기 시작했다. 감청반 근무 덕분에 아빠의 직장생활과 두 분의 부부갈등이 뭔지 제법 소상히 알게 되었다. 감청일지도 만들었다.


요일,시간,장소,날씨,내용,파손기물 등을 적었다. 처음낙서하다가 그렇게 진화 해 버렸다.

동생은 내가 감청할 동안 가끔 울어서  자주 달래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 컴에서 게임을 하게 해 주었다. 컴뱃 게임을 틀어주면 거기서 동생은 신나게 사람을 죽인다. 처음엔 울다가, 죽이며 웃는다. 싸우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집안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도 동생은 이미 귀와 눈이 전쟁 중이라 별로 개의치 않는다.

전쟁 소리가 커지다 아빠가 문을 쾅 닫고 나갈 때 나는 재빨리 동생 게임을 끄고 준비한 그것을 해야 한다.


엄마는 쾅 소리 후 정확히 12초 뒤에 우리 방을 덮친다.

5,4,3,2,1 덜컹, 휙, 쾅 우릴 쳐다보고 3초 만에 나간다. 동생은 침대에서 자는척하고 나는 헤드폰 끼고 영어 회화 영상을 틀어 놓고 있으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집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고 엄마가 없어진 지금은 귀가 어두운 할머니 tv소리만 남았다.

 

나는 엄마를 닮았다. 키도 크고 잘생긴 훈남에 우등생이다. 이미 여자애들 쪽지도 여러 번 받았다. 사람이 일단 잘생기고 귀티 나면 인간의 왕국에서 상위 포식자의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을 고등학교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새로운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잘해 주셨다. 엄마는 처음 상담받으러 오는 날 최선을 다해 차려입었고 그 나이에 아직도 어울리는 빨간색 미니스커트와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12센티 검정 하이힐. 진주 목걸이가 무색할 만큼 아름답고 가느다란 쇄골이 보이는 깊게 파인 실크 상의를 입고 샤넬의 진한 냄새 풍기며 등장했다. 중년의 담임 선생님은 입꼬리가 내려 가질 않았다. 옆에 가만히 앉아 대화를 듣던 나는 선생님이 가끔 엄마의 가슴을 훔쳐보는 시선도 느꼈다. 그리고 그 눈의 절정은 입에서는 다른 말로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아, 아버님이 OO고 설립자 세요? 저도 그 학교 압니다. 꿈의 직장이죠 하하"


그때 엄마 표정은 움짤로 돌아다니는 다리 꼰 샤론스톤과 비슷해 보였다.  

상담을 마치고 엄마랑 복도를 걷는데 친구들은 엄마를 여자로 보았다. 무슨 애들이 다리 먼저 쳐다보고 엄마 얼굴 보고 내 얼굴 마주치면 야릇한 미소로 엄지손가락을 슬쩍 보여주었다. 어떤 애는 중지를 보여준 애도 있었다. 우리 학교 일진이다. 나는 그때 " 우리 엄마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가 창피했다.


언젠가 엄마가 집에서 기생충 영화를 보다 "중요한 건 기세야" 하던 주인공 대사에 꽂혔다. 과일 먹던 우리에게 "저것 봐라 애들아, 공부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중요한 건 기세야 알았지?"

중요한 건 파워야 하면 알아듣는데 어른들은 왜 기세라는 한자로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학교에서 공부를 통해 기세를 배우라고 말했다.


엄마는 가끔 집에서 영어로 말한다. 그것도 일주일에 세 번 일하는 아주머니가 집에 왔을 때 자주 그런다.

미국 다녀오셔서 그런지 엄마는 발음이 좀 과하다.

제일 많이 하는 말이 " You know what I'm saying?" 이랑 뉴스 보다가 약간 작은 소리로 말하는 "What the fuck"이다. 엄마가 길게 영어로 말하면 아빠는 핸드폰 보는척하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엄마는 혼자 한국말한다. 방으로 들어갈 때 들리는 말은 " 여보, 좌파들 하여간 문제 아냐? 의로운 척하면서 할 짓은 다 하잖아" 엄마는 젊은 태극기다.


그러던 우리 집에 전쟁이 터진 것은 아빠가 퇴사하고 백수로 지내다 후배와 창업한다고 엄마 몰래 담보대출 2억을 사기당한 그날 터졌다. 그날은 평소 기관총 소리 말고 영상으로 보았던  6.25 새벽, 농가에 떨어진 포탄 소리 같았다.


쾅!!!  " 너 미쳤냐?"


아빠의 이혼과 재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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