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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Apr 23. 2020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실은 영화 평론이나 리뷰를 하려고 글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남자지만 우연히 여성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되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문장을 떠올라서 시작했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의 저자 마크 해던은 장애를 가진 소년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장애를 가진 소년이 되었다. 이처럼 사건이나 인물은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힐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영화 "We were solders"는 장엄한 전투신과 멜 깁슨을 빼면 낡은 필름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감독은 전쟁 영화에 여성과 가족을 은밀히 심어 놓았다. 전장에 없는 무어 중령(멜 깁슨)의 아내가 오히려  영화 절반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지나고 보니 명분 없었던 베트남전은 미국 젊은이와 자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감독은 명분 없던 살육 전쟁을 희석하려는듯 무어 중령의 연설에 "더 이상 우리는 성조기나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 명분은 내 옆의 동료였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위상이 떨어져 보이지만, 엉터리 지도자 트럼프 마져도 베트남 전의 실패처럼 역사의 한 과정을 통과하는 중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문명사회로 진입하며 이데올로기, 인종차별, 성차별 등 인류적 과제를 역사에서  투쟁하며 경험했다. 우리가 아직도 성차별, 인권, 개고기 등의  유치한 담론으로 새 시대의 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애국주의 patriotism는 모든 국가의 많은 영화에 보편적이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에서 아내의 기다림과 두려움, 전사통지서에 무척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호기롭게 파티를 마치고 전장에 남편을 보낸 가족을 남긴 채 지옥같은 살륙의 땅에서 죽이고 죽임 당하고, 결국 엘로우 캡 기사가 전해 주는 전사 통지서 한 장, 이 장면 때문에 나는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2

 

 같은 부대 근무하던 내 친구 정문은 어느날 비행사고로 순직했다. 


 그의 애기愛機 C123는 야산에 추락했고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화마처럼 순식간에 부대 안으로 퍼졌다. 하지만 관사 가족들은 사고말고 구체적인 소식을 갖지 못했다. 오늘 아침 출근한 남편 중에 누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것 인가 하는것은 좀 더 기다려 야 했다.  아내들은 정말 피말리게 긴 하루동안  남편을 기다렸다. 마치 영화 속 무어 중령 아내처럼, 혹시  남편의 순직 통지서가 돌아올까 봐,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수백 번 반복하며 손톱을 물어뜯고 평상심을 지키고 싶지만 불행은 예고 없이 정말 작은 힌트 하나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사실 그 긴 시간동안 추락한 비행기와 승무원을 확인한 비행 단본부는 사고 수습과 함께 누가 이 소식을 가족에게 알릴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처럼  옐로 캡, 택시운전사도 아니고 책임 있는 사람이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들은 비행 대대장과 사망조종사 동기생 그리고 군종목사가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정복을 갖춘 그들은 무거운 침묵을 타고 그녀에게로 향다. 관사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누구도 무말이 없었다. 아니 못했다. 군대 시절을 복기해보면  지휘관들이 얼마나 어린 친구들이었는지 우리는 나이 들면비로소 느낀다. 기억은 어릴 때를 기억한다. 30대의 죽음을 알리는 조금 더 나이 든 30대를 상상해 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이처럼 모두가 함께 걷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정복 입은 세 사람은 분명 전사통지서를 쥐고 온 저승사자였다. "아니죠?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대대장 품에 쓰러져 오열했다. 눈물범벅으로 악역을 자청한 세 남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여인의 사망 골짜기에서 같이 울어야 했다. 곧이어 사고 소식은 부대에 공적으로 전파되었다.  


"훈련 중 엔진 고장으로 추락. 기장 부기장 포함 승무원 6명 전원 사망. 비행중단,전원 대기할 것 "


그날부터 동일 기종의 비행은 금지되고 부대원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함께 걷는다. 젊은 죽음은 잔인하고 아직 죽음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아빠가 퇴근하지 않는 이유를 몰라 더더욱 슬프다. 세월호가 지겹다고 하는 이들은 젊은 죽음 근처에 못 가봐서 그렇다. 정치와 이념을 떠나 젊은 죽음의 상처는 평생 어루만져야 겨우 숨 한번 쉬고 살수있다. 망자의 가족은 자기가 죽을 때까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혼자 걷게된다.


정문과 승무원 전원은 함께 장례를 치뤘다. 젊은 죽음에 슬퍼할 동료들이 전국에서 사망의 골짜기에 모이고 순직자의 각기 다른 종교 때문에 군종 신부, 목사, 법사의 종교의식이 차례로 진행되었다. 세 개의 종교의식은 형식일 뿐 슬픔공동체, 이들은 모두 하나였다. 군악대의 찬송가 연주는 슬픈 공기를 아픔의 불로 점화한다. 나지막한 울음소리는 빈소가 마련된 강당을 가득 채우고 망자 친구의 조사는 가슴을 벅벅 찢는다. 그렇게 젊은 정문과 동료들은 사망의 골짜기를 떠났다.


 몇 달이 지나자 공군은 정문 가족이 관사를 비우고 떠나 줄 것을 공지했다. 정문 가족은 사람들 기억에 지워지고 평생 골짜기를 홀로 걷게 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망자가 떠난 뒤 망각에 묻히는 사람들이 더 슬프다.


# 3

 할아버지가 위독하단 연락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황해도 곡산 출신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비옥한 땅과 재산을 버리고 월남했다. 어머니 기억에 의하면 그는 지주였고 농기계 제작소도 운영해 넉넉하게 인생을 살았다. 공산당이 들어오면 지주부터 처형한다고 해 그들은 피난을 결심했다. "통일이 되면 그 땅이나 찾을 수 있으려나" 어머니는 자주 중얼거리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할아버지는 위독했다. 중환자실에 온갖 기계를 달고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해 대학에 갓 들어간 나는 할아버지 곁을 지키기로 하였다. 내가 병원에 당도했을 때는 할아버지 호흡장비를 제거하고 있었다. 자가호흡이 멈추면 그 시간은 임종 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금방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온 가족이 그의 영면을 고대하며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그는 생에 미련이 많은가보다. 사망을 기다리던 가족은 하나둘 떠나가고 나 홀로 남았다. 내가 병실을 지키다 위급하면 가족에게 연락 달라는 사명을 안고 지켰다. 할아버지는 밤새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

나는 밤새워 할아버지 상태를 노트에 적었다.

 

"00시 00분, 기침함"

"00시 00분 알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림"

"00시 00분 새근새근 소리 내며 주무심. 호흡은 정상으로 보임"


아침이 오면 가족들에게 밤새워 근무한 효심을 자랑하고 싶은 것인지 생명과 죽음의 Thin Red Line을 관찰하고 싶은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신 레드 라인(Thin Red Line·1998)`은 태평양 전쟁기 `과달카날 전투`(1942)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제임스 존스(James Jones)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숀 펜, 에이드리언 브로디, 존 쿠삭, 우디 해럴슨, 닉 롤티, 조지 클루니, 존 트라볼타, 자레드 레토와 같은 대형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소설(영화) 제목을 신 레드 라인으로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평론가는 너무나도 사소하게 갈리는 삶과 죽음, 모호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신 레드 라인`, 즉 `얇고 붉은 선`으로 은유한 것이라고 했다.
 (MK 남보람 기자, 2019.7.17)


할아버지는 며칠 동안 죽음과 싸우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밤새토록 중얼대는 소리의 정체를알려주었다.  "시편 23편이야" 할아버지가 생전에 그 구절을 제일 좋아했으며 마지막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고 그 구절을 암송했을 거란다. 가만 생각해 보니 밤새 뜻 모를 할아버지의 중얼 거림은 일정한 운율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떠나 한 인간이 죽음 앞에 자기가 지켜온 것들을 믿고 소중하게 떠나는 모습은 숭고했다. 그의 눈에 비친 마지막 세상 한 장면, 희미해져 가는 의식, 의식이 끝나 알 수 없는 세상으로 가는 두려움, 이 모든 것이 전장의 신 레드라인 Thin red Line 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난 할아버지 덕분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을 가지고 산다.


나도 할아버지처럼 죽고 싶었다.


어제는 바람이 그렇게 심한 날 신축 빌딩에서 작업하는 고층 사다리 차를 보았다. 네 개의 로봇발 같은 쇠로 지탱하고 철골을 고층으로 올려 보낸다. 횡단보도 앞에서.  "저게 넘어지면 많이 죽겠구나" 저 철골에 맞으면 비명도 없이 객사할 것을 상상하며 우리의 하루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생각도 한다.


아침에 출근한 남편과 아내, 우리  일부는 - 베트남 이아드랑 계곡 전투에 투입된 공수부대 395명처럼-   퇴근 못할지 모른다.    


슈베르트: 모든 영혼을 기리는 날의 기도

(Schubert: Am Tage Aller Seelen, D.343, "Litanei Auf Das Fest Aller Seelen")

https://youtu.be/VI4_mBZRW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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