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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Jun 19. 2020

복면 미왕

오랜만에 만난 사촌 누나는 살이 좀 올라 있었다.


"키도 작은 여자가 살마저 찌면 큰일인데 어제도 고기 먹었지 뭐냐?" 누나는 언제 차를 바꿨는지 그 비싸다는 벤틀리를 끌고 나왔다. 나야 뭐 한국사람들 차로 지자랑 하는 꼴이 별로 성에 차지 않아, "이 차는 어디 거야?" 하고 무심하게 물었다.  "나도 몰라" 누나는 차종도 못 알아보는 무식한 미국 촌놈 비아냥대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 차가 벤틀리라고 알게 된 것은  식사를 마치고 한적한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 그 옆에 세워둔 같은 로고를 가진 다른 차 번호판 밑에 벤틀리라고 쓰인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벤틀리 누나는 시종일관 오랜만에 만난 동생 소식과 주변 이야기들을 경청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언제나 주도적이고 총명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그녀 앞에 말을 무척 조심하는 편이지만 나는 그녀를 만날 때 아이처럼, 허당처럼 굴기 때문에 그녀의 창과 방패는 언제나 내 앞에 내려 있다. 그녀는 자기보다 약한 자를 항상 감싸기 때문에 한국에서 약자인 나에게 관대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편하게 대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서로 대화가 편한 편이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그녀의 휴대폰에 벨이 울렸다.  그녀 목소리가 간드러진 것으로 보아 친한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우리 집안에 이런 유형의 여자가 많은데 친하기 전에 목소리는 간을 빼먹듯 간드러지다가 친해지면 "목 더 길게 내 밀어" 무뚝뚝한 사형장 백정 소리를 낸다. 그녀가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 네네, 한번 오세요"

 "누구야?" "아, 미안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화가야. 아 세상에 이분이, 참 너 알지? 내 친구 미대 교수하는 애, 걔 소개로 만났는데 내가 그린 그림 한번 보자 하길래 휴대폰에서 하나 보여 주었더니 한참 놀라더라. 그러더니 나보고 그림 하시래 "


누나는 말하면서 눈동자 동공도 커지고 말이 빨라졌다. 저런 태도는 그녀의 호기심과 만족이 상당 수준 올라갔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 그래서 그랬지, 아휴, 전 밥하는 것 말고 몰라요, 밥하다가 캔버스 놓고 그저 하나 그린 거예요"

화가는 누나의 그림에 소질이 있어 보인다고 아주 높게 평가해준 것 같았다. 그러면서 누나는 나에게 휴대폰에 저장된 그림 또 하나를 보여주었다. "아 집에 걸려 있는 거?" 누나는 새로운 작품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평생 딱 두장만 그렸을 뿐이었다. 화가는 그렇게 누나와 인연을 맺고 매형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무료로 건강관리받으며 가끔씩 만나 식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만약 누나의 그림을 가지고 고3 여학생이 "대학에서 미술 전공하려는데 제 그림 좀 봐주세요" 했으면 어땠을까? 후후, 나는 먼저 웃음부터 나온다. 아마 "더 열심히 하라면서 자리를 차고 나갈 확률이 높다"에 20불 건다.


복면가왕 말고 복면 미왕 같다.


  



중3 때 미술 과목은 깡마르고 깐깐한 여자 선생님이 가르쳤다.  그분은 매우 무서워 미술 숙제 안 해오면 그 자리에서 회초리로 피나게 맞았다.  당연히 미술이 있는 시간에는 숙제를 담은 두툼한 도화지 노트를 들고 체육복과 함께 무겁게 등교했다. 그날 내가 미술 숙제를 까 먹고 아침을 맞이 했을 때, 그 먹먹한 공포감은 종아리 붉은색 그리고 선생님의 깡마른 초상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늘은 맞아 죽자"하고  미술 도화지만 챙겼다. 감히 숙제를 안 하고 미술을 만나러 학교에 간 것이다. 미술은 그날 수업 가운데 마지막 시간이었고 나는 "미술장의 이슬"로 사라질 각오를 품고 하루종일 피나게 시간을 물어뜯고 있었다. "자, 오늘은 여러분이 숙제로 해온 추상화를 발표하는 시간으로 수업을 할 겁니다. 자기 숙제한 거 책상 앞에 펴고 1번부터 차례로 나와 발표하세요" 숙제 검사가 아니라 발표였다.  정말 난감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발표하는 애들 보느라 책상 사이를 오가지 않았다. 책상에 아이들은 형형색색, 말 그대로 알아보기 힘든 추상화를 펼쳐 놓았다. 내 짝은 무슨 초딩 미술 심리검사 그림 같은 걸 펴 놓았다.


" 야, 너 미쳤어? 숙제 안 했어?" 짝은 내가 펼쳐놓은 하얀 도화지를 보며 빠르고 강렬한 속삭임으로 나를 다그쳤다. " 어, 오늘 디지게 맞을래" 내 결연한 대답에 그는 더 빠르고 강렬하게, 잘못하면 들킬것 같은 속삭임으로 응수했다. "야, 나 지난번에 미술 숙제 때문에 맞았는데 더럽게 아파, 피딱지도 오래가고, 저 여자 손, 아주 매워! " 짝은 지금 내 결연한 순교자의 마음을 거세게 찢고 있었다. "아, 씨, 그럼 어쩌라구?" 맞아 죽겠다는 순교자의 의지가 약해지자 "목숨만 살려주시면 성을 갈겠습니다." 내 마음은 패망한 일본군 처럼 려움에 덜덜 떨 있었다.


앞에서 발표가 이어지고 발표자에게 주목한 선생님은 맨뒤에서 당황스럽게 속삭이는 우리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제자들의 기특한 추상화 작품 해설을 즐기듯, 입가에는 보기 힘든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숙제를 가져온 짝은 최후 조언을 선포했다. "야, 너 몇 번이야?"  "59번" "그럼 아직 50명 남았으니까 지금 그려. 내가 망볼게" 짝은 정말 착한 녀석이다. 나를 구원하려 남의 일을 제 일처럼 추스르고 있으니 솔직히 감동이었다.


나는 낙서 가득하고 오랜 세월동안 매맞고 크던 선배들을 묵묵히 지켜보던 낡은 책상 아래 팔레트를 펴고 물도 없이 물감들을 무릎에 펼쳐놓았다. 짝은 다리를 떨고 손톱을 뜯으며 앞에서 발표하는 친구들 작품이 선생님의 호감을 받으면 덩달아 큰소리로 박장대소하며 오버하고 있었다. 내가 숙제 만드는 것과 친구의 오버가 도움이 되나 잠깐 의문도 들었지만 내 짝은 최선을 다해 주의를 분산시켜 산만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나의 은밀한 번개 숙제를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영롱한 자식 같으니라구......


위기가 찾아올 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그때 보았다. " 뭘 그리지?...... 그래 바로 그거야" 하늘에서 영감님이 내려오셨다. 아주 간단하고 빠르게 직선을 이용해 처리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내가 만든 작품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이 작품의 해설을 어떻게 잘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뒤에서 몰래 숙제를 마치자 여유가 생겼다. 아직 55번이 발표하고 있었다. 우리 반이 그때 한 60명쯤 되었으니까,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남았다. 바로 그때 "딩동댕동" 오호, 수업을 마치는 벨이 울렸다. 이제 숙제는 그냥 내면 되는 거다. 역쉬, 하늘은, 그러나,


"자자, 조용, 오늘 마지막 수업이니까, 여러분 조금만 더 친구들 발표를 듣고 마칩시다 어때요?"

"네~" (거짓의 함성이다. 무서워서 "네~" )


수업시간 연장으로 결국 내 순서까지 돌아왔다.

내 도화지에는 쓱쓱 대충 그려진 일곱 칸에 "빨주노초파남보"가 가득 칠해져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59번 강노아 발표하겠습니다. 모두 우주가 검은색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밤에 보이는 우주는 까맣지만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으로 더 나가면 그곳에는 지금 제 작품처럼 무지개 색이 다 있을 것 같습니다. 제일 먼저, 앞에 빨간색은 '전쟁의 신이 지배하는 세상의 색'입니다. 그곳에는 전쟁과 살육 죽음 폭력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인간 피의 색이 빨간 것은 전쟁의 나라에서 인간의 몸에 색으로 들어와 인간이 전쟁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노란색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화의 나라 색'입니다. 이곳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해주는 왕국입니다. 이 나라는 모든 것이  노란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병아리를 보십시오. 거기서 온 것 같지 않습니까? 요지점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와~ 하며 빵 터졌다. "계속해봐" 선생님은 내가 뻥으로 만든 숙제로 뻥치고 있는데 호기심과 함께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경청하고 있었다.  초록은 '무언의 세상 색'입니다. 이곳은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지만 서로 소통하며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지구의 식물들은 다 이곳에서 온 것입니다.


나머지 색도 유창하게 다 해설했다.  내 진지한 썰에 아이들도 진지하게 집중하는 것 느껴졌다.

발표를 마치자 진중하게 나를 듣던 선생님이 말했다.


 " 너는 책을 참 많이 읽는 모양이구나. 참 잘했어, 아주 좋은 작품이야. 자 모두 박수한번 쳐 줄래?"


그날 발표 중에 박수를 받은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내 옆에서 나와 공모하고 나를 지휘하던 내 짝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흥분한 원숭이처럼 벌떡 일어나 박수와 환호 아니, 아예 만세삼창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미술이 싫어졌다.


매를 모면하려던  내 거짓말을 좋은 작품이라 오해한 선생님이 그렇고, 원래 미술이 항상 어렵고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무지해서  미술은 어렵고 이해를 잘 못한다.




누나는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 미술가와의 만남을 주제로 계속 이야기했다.


 " 난 말이야 이상하게 직선만 사용해, 곡선은 영감이 오지 않아.
   그런데 미술가 선생님은 그것도 개성이라 하시더라, 호호호"


누나 그림은 내가 중학교 때 그린 그 직선그림하고 많이 닮았다.




https://youtu.be/KKcbFgmio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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