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노아 Jun 18. 2020

사랑 너머 우정

도시의 집은 시끄럽다. 창문을 열면 자동차 소리와 매연, 사람 목소리가 방으로 침범한다.


초록 자연을 한참 살다 돌아와서 그런지 내 몸은 어두워지면 잠이 오고 동이 트면 깨는 일상에 맞추어져 버렸다. 회색 도시에도 몸이 만든 기억에 따라 새벽이면 눈을 뜬다.  몸은 정상이 아니다. 마스크를 쓰고 외출하는 것부터 얼굴 여기저기 작은 부스럼도 피어오른다. 쾌변은 사라지고 몸의 신호들로 보아 장의 균형이 망가졌음을 직감한다. 양배추 한 통 사들고 닭 모이주듯 장에 좋은 세균 먹이를 주었다.


도시에 돌아온 뒤로 미루어 놓았던 문제들을 직접 대면하기 시작하자 문제들은 번호 받고 줄을 서서 하나씩 열변을 토했다. 드디어 머리가 복잡해지면 마음이 송두리째 요동한다. 마음이 흔들릴 정도면 지면의 바람이 매우 강하다는 뜻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느끼면 머리는 이내 두려움에 대한 방어태세를 갖춘다.  나에게 방패는 독서와 글쓰기 음악이다. 이것들은 여유가 있을 때 사용하지만 이처럼 몸과 마음이 많이 흔들릴 때 사용해야 한다. 마침내 주말에 커피 한잔 놓고 내가 자주 일하고 공부하는 서점에서 신인작가 책을 한 권 골랐다. 책을 읽다 이런, 저자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퀴어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많이 놀랐다. 글 속의 주인공이 남자를 애인으로 부를 때 책을 잠시 덮고 저자를 검색했다. 퀴어 queer 작가? 놀랍고 새로웠다. 난 성소수자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인간으로 존중한다.


 그런데 글을 읽으며 많이 놀랐다.  성소수자가 겪는 가족, 애인과의 갈등을 읽다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한참 뒤에 책을 덮고 남의 일 생각에 잠겼다. 내 앞의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고 커피숍의 다른 이들을 쳐다보기도 하며 목을 스트레칭하듯 가벼운 몸짓을 계속하던 나를 발견했다. 조금 뒤에 머리에서 드디어 나의 편견들이 난파선 나무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성소수자 하면 왜 남자들만 주목하지? 레즈비언도 많을 텐데, 저들은 사랑을 어떤 식으로 하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올라오자 마침내 생각에게 스톱 사인을 보냈다. 그만!


내가 지금 여기에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저들 사랑은 저들에게 일단 맡겨 놓자고. 수면에 떠오른 생각들을 물속에 다시 밀어 넣었다. 이렇게 우연히 나는 퀴어 작가 작품 한 개를 낯선 여행처럼 처음 만났다. 신선했다. 편견 몇 개만 허물면 그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일하고 사랑하며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러다가 오늘 제목이 생각의 수면 위로 훅 스티로폼처럼 떠올랐다.


"사랑 너머 우정"은 깊이 생각한 협의의 개념이다. 

조금 더 풀어 설명하자면, 삶의 여정에 사랑은 본능으로 시작하고 유효기간이 짧아 목적을 달성하면 곧 사라져 버린다. 동성애자들이 혼란스러운 부분은 이 지점 같다. 몸에서 사랑으로 인식하고 사랑을 느끼다 다음 단계(출산, 결혼)로 진행이 어려우니 애매한 배신, 바람, 욕정들이 계속 충돌하며 고통을 겪는 건 아닐까.(사실 잘 모르면서 하는 말이다. 용서하시라)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은 지나간다. 혹시 당신은 사랑 그 너머에서 당당하게 입구를 개방한 우정의 길은 보았는가? 사랑 너머 우정은 결혼 이후 사랑이 식어버린 배우자들도 발견하는 길이며 연인 사이에 사랑이 끝났지만 진지하게 우정을 가지고 걸어가는 이들이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몇몇에게 해당되는 협의의 개념이다. 독자들 가운데 부부 관계 속에 우정을 발견하고 그 길로 동행하는 분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고, 둘 사이에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며 이번 생에서 사랑하지 못함을 원망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부부의 우정은 결혼생활을  무성의하게 하다가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 표현과 같은 말은 아니다. 적어도 사랑하듯 우정하는 상태를 말한다.  혼인의 시간이 오래될수록 우정으로 길을 바꾸지 않으면 얼마 안 가 부부는 갱년기라는 암초를 만난다. 갱년기는 한마디로 남자와 여자가 호르몬 때문에 성을 바꾸는 이상한 시기다. 열대어 스워드 테일이 중성처럼 태어나 물의 온도에 따라 암수가 정해 지듯 인간은 사랑할 때를 넘기면 영원히 사랑은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 물론 중, 노년기에 사랑하기도 하지만 건강관리가 잘되었거나 성욕이 많은 유전자로 남들보다 오래 그 힘을 가진 제한된 경우 같다.


사랑은 어쩌면 취한 것과 비슷하다. (술 취하는 것이 유아기로의 퇴행을 의미한다면 사랑도 섹스를 통해 취해 느끼는 동일한 모태의 안전욕구의 복제 경험 일 수도 있다. 행복하고 달콤하고 영원할 것 같은. )


사랑이 끝나고 정신이 돌아온 부부는 결혼 중에 갈등하며 체념한다. 하지만 연인은 갈등하면 바로 이별을 검토한다. 그러나 결혼은 법적 구속력을 갖고 만인 앞에 선포한 약속으로 타인의 시선도 무시 못한다.(부조금 도) 하지만 부부도 갈등이 계속되면 이혼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현대인은 이혼에 대한 타인의 시선이 조금 관대해진 것으로 느껴 이혼을 아주 빠르고 쉽게 결정한다. 이 경우 난제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깊이를 갈등 너머에서 경험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리는 문제가 있다.




사랑 너머 우정으로 전환하면 결혼은 동거가 아니라 참된 동행이다. 동행은 여러모로 삶을 진행하는데 유리한 지혜다. 어찌 보면 현대 가족 구성의 트렌드로 나 홀로 살기가 대접받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며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모아 놓은 돈으로 여행이나 하고 남자가 성적으로 그리우면 원나잇으로 해결하려던 시대적 풍조가 있다고 일본통 에게 들었다.


한편 혼자 살면 노동에 전착한 삶의 수고를 마치고 훅 찾아오는 고독에 감염되기 쉽다. 물론 고독도 음미하면 맛이 좀 쓰지만 선악과처럼 먹음직하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해 보이는 삶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정의 상대는 밥이나 술 한잔 하는 사이가 아니라 자신의 고독에 깊게 다가설 수 있는 대상일수록 좋다. 그가 삶에 대한 성찰이 토론 가능한 상대면 좋다. 마치 작가가 작가를  만나면 공감대로 호감을 가지듯.




옛날 옛적에 어떤 주말, 공군비행장에서 조종사들과 골프를 치고 있었다.

그날 갑자기 어라트Aleart 항공기 두대가 급발진을 했다. 비상대기 중 훈련비행이라 짐작한 일행은 곧이어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다 " 김대위랑 박소령이 올라가네. 재들 오늘 근무였나?" 그러자 캐디가 물었다. "어떻게 조종사 얼굴도 안 보이는데 아세요?" 우리 일행 중 가장 높은 최 대령이 답했다. " 기수를 드는 순간 습관을 보면 누군지 알지" 오랫동안 비행을 감독하며 비행하는 자세 만으로 누군지 아는 것은 그들이 동료이자 동행했기 때문이다. 전투조종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진 건 내무반에 가족 사는 것 말고 없어" 관사의 가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거의 24/7 동고동락한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깊은 전우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전우가 되는 것에는 계급이라는 위계질서와 충성의 권위가 맛깔나게 버무려져 이들 사이에 깊은 사랑을 느끼는 전우애가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임무가 어렵고 힘든 군인일수록 동거 아닌 동행을 한다.

 

가끔 이혼한 친구 중에 전처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같이 만나기도 한다. 그들은 결혼 때보다 더 친밀하다. 물론 둘 다 아직 독신으로 살아서 자유롭지만 내 친구는 둘 중 하나가 결혼하면 이런 자유로움이 어려울 거라고 말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서로가 헤어져보니 공간을 공유할 필요가 없고 의견 충돌 경험도 작아진 거다. 가끔 보는데 싸울 일도 없고 두 사람은 아이 때문에 공감대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이상하게 이혼하고 금슬이 좋다. 꿈같은 이야기 같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다양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우정의 길로 들어선 것 같다. 


 마지막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은 사랑 너머 우정으로 도달하지 못한 경우 그것이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살아야 한다.
그저 나랑 궤도가 다른 사람과 궤도변경이 불가능해서 생긴 일이다.
상대를 탓하지도 말고 자신도 탓하지 말고 자존감과 자기 정체성을 꼭 지켜가면
좋을듯하다.



나는 도시에서 또 다시 평상심을 회복하려고 분투한다.

자연의 사람들은 도시를 그리워하고 도시 사람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죽을 때는 삶을 아쉬워하고 살아갈 때는 죽고 싶은 일만 가득하다.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날아오를 즈음 이런 것 그만하겠지.  


오늘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 보았다. 맨날 두서없이 적고 언제 좋은 글 쓰려나. 훗


         

          

작가의 이전글 어려움이 던져주는 축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