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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Jul 03. 2020

눈치 배워 갑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눈치 고수들이 모여사는 집단이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고 아주 오래전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외삼촌도 그렇다. 유명해진 그를 공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때 유력인사들 식사자리에서 "우리 집안이 눈치가 백 단인데, 허허허" 농담 어린 진담을 분명히 들었다. 내가 장남이라 유전적으로 어머니 특징을 좀 더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녀 눈치를 유전받아 출생 직후 이미 십단 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 눈치 없고 융통성도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어려서도 이모가 사 온 옷이 맘에 안 든다고, 가져온 수박이 맛없다고 해 꾸중을 많이 들었다.

 "그냥 고맙습니다 하는 거야"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 똥수깐은 수세식이 아니고 푸세식(뒷간의 방언, 우리는 똥투깐이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으로 냄새도 많이 나고 학교 본관 멀리 바깥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여덟 살 때쯤인 것 같다. 그 어머니는 반바지에 파란 양말을 신겨주었다. " 싫다고,...... 신으라니까, 괜찮아" 나는 그때 색이 있는 양말을 무척 싫어해 간절히 저항했지만 어머니가 이겼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센스 있는 의상실 엄마 코디로 반바지에 짙은 파란색 양말을 발목까지 올리고 어색하게 등교했다. 아이들은 나만, 아니 내 발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럭저럭 재미없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 그거 알잖는가? 설사도 아니고 대장 속 거시기가 익어 가득 찼을 때 찾아오는 쾌감 섞인 진통, 그놈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화장실에 갈 수가 없었다. 우선 평소 같지 않은 내 양말 색 때문에 친구들이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며 놀렸고 (그들은 파란색 양말도 없는 놈 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왕따는 아니었다. 성질 있어서, 붙으면 다 부셔 이겼다.) 그 아이들은 화장실 가면 따라와 장난 칠게 분명했다. 또 하나, 나는 화장실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똥투깐에는 귀신이 살아서 사람 없을 때 앉아 일을 보면 똥 묻은 귀신 손이 쓰윽 올라와 "내 불알 내놔" 한다는 그 말.


수업이 끝나갈 무렵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참아도 참아도 감당하기 곤란했다.

마침내 수업 중에 손을 번쩍 들었다. 갑자기 그러자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며 "뭐?"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으로 배를 가리키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는지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라고 신호한다.

이 팬터마임의 음성 소거를 소리 나게 하면 " 선생님!" "뭐?" "똥 마려워요" "갔다 와" 이런 거다.

나는 정말 우리 집 강아지 코카스파니엘처럼 달렸다. 코카는 무진장 빠르다. 코카 이 배신자 놈이 지난번 목줄 놓치자 도망가며 뛰는데 거의 배달의 기수 오토바이만큼 빠르더라.   수업 종료가 거의 다 되어서 종례를 건너뛰고 집으로 도망가려 가방 들고 똥투깐으로 목줄 놓친 코카처럼 달렸다.  달리는데 옛날에 친구들이  화장실 벽 타고 올라와 천장에서 야릇한 미소로 쳐다보던 얼굴, 문 열라는 외침에 잠금고리 없던 화장실 문을 손으로 꽉 잡고 버티며 일 보던 생각 등이 빠르게 스치며 지나갔다.  게다가  똥투깐 바닥에 똥 묻은 손이 올라오는 상상이 강림하자 나는 화장실로 뛰다 방향을 바꿔 바로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를 생각하면 그대로다)


뱃속은 투하할 무거운 폭탄을 가득 채운채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거리의 집으로 막 뛰기 시작했다. 폭탄은 점점 아래로 아래로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10,9,8,7,......"  참고 또 참았다. 참으려고 찬송가를 군가처럼 불렀다. "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군가처럼 불렀다.(난 어린이 성가대 솔리스트였다)


찬송가 덕분인지 신이 친구 되어 주신 건지 기적이 일어났다. 똥 폭탄이 발사 카운트 3초를 남겨놓고 멈추었다. 생각이 멈춘 건지 괄약근이 힘을 쓴 건지. (나중에 자라서 군대 훈련소 새벽 구보하다 샛별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 노래 부르다 어릴 적 생각나서 피식 웃었는데 따로 불려 나가 죽도록 맞은 기억도 난다. 걔네들은 왜 맨날 건수 잡아 때렸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 때리던 사람이 별도 달더라 ) 아무튼 집에 들어서자마자 의상실에서 재단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대뜸 소리 질렀다.


 엄마~

신기하기도 하지 엄마는 눈치가 백 단이라 내가 똥 마려운 것을 어찌 알았는지 선생님처럼 고개만 까닭이며 가게에서 가장 가까운 부엌으로 가라고 눈짓하였다.

 

" 똥 마려워? 학교에서 하고 오지"

나는 급하지만 대답했다. " 나온것 같애"

 " 바지 내려봐"  순간 엄마는 수술실 간호사 같았다.


아~ 바지를 내리는 순간 폭탄은 아주 굵고 아름다운 황금색 구렁이로 변신하여 쑤~욱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


난 이제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깔끔한 어머니는 불량식품 "달고나" 몰래 먹고 들어 오면 "어떻게 알았지?"바로 눈치 백 단으로 체포하여 어디서 왜 그걸 먹었는지 취조하고 " 달고나를 먹었습니다 " 세 번 복창시키고 자 막대기로 가볍게 입을  세 번 때리며 "다시 몰래 먹으면 진짜 맞는다"하던 분이다. 부엌의 똥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실까? 능구렁이 한 마리가 끊어지지도 않고 부엌에 다 나왔다. 건강하고 튼실한 녀석이 태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 바지 다 벗어" 어머니는 엉덩이를 까고 뒤처리하더니 똥 묻은 바지와 속옷을 대야에 넣고 반나체의 내 손을 잡아 근처 맑은 개울에 데려갔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서울인데 개울도 흐르고) 그곳에는 빨래하던 이웃 아낙들도 었다. 어머니는 정말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내 엉덩이를 차가운 개울물에 담가 박박 씻었다.


긴 침묵 끝에 " 앞으로 또 그러면 학교에서 꼭 하고 와 알았지?"

"네......" 나는 친구들의 화장실 괴롭힘과 똥투깐 귀신 이야기 아직도 하지 않았다.


똥싸개 아이는 그렇게 무럭무럭 자랐다.

한국에서 대학원 마치고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그 아이는 눈치가 백 단을 넘지 못했다. 가족들은 살면서 눈치가 없다고 자주 핀잔주었다. 난 어쩌면 눈치 구십구단으로 미국에 살았다.(일단 바보는 아니니까)


미국은 참 달랐다. 눈치 단증이 필요 없었다. 필요하면 달라하고 뭐 좀 마실래? 아니, 그러면 안 준다.  속마음을 말하고 상대는 진지하게 듣고 문제는 자기 일처럼 진지하게 대화했다. (적어도 내가 만난 미국인들) 고개를 까닥이고 그 속에 함의된 것을 눈치로 알아맞힐 필요가 없었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들으면  "쉽게 다시 말해줄래?" 그러면 아주 쉽게 다시 말해준다. 그리고 꼭 덭붙이는 말 " Do you know what I'm saying?' " you follow me?" 확인까지 해 주었다. 미국에서 내 구십구단 눈치는 점점 더 내려갔다. 아마 한 이십 단 정도면 살만했다. 게다가 난 군에서  방심하여 귀마개 안 끼고 권총사격 하는 바람에 이명 증상으로  한쪽 청력이 매우 약해졌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영어가 제대로 들릴 리 없고 한국말로도 대화중 자주 못 알아들어 딴소리할 때가 많았다. 좌중은 자주 나 때문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난 잘 안 들리는데.


그러다가 최근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세상에, 이십 년 넘게 떠나 있던 낯선 한국 살람은 눈치가 전부 백 단이 넘었다. 그걸 금방 깨달았다. 아주 빨리 눈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상대의 마음을 말하지 않고 읽어야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떤지 짐작하고 다음 말을 해야 하고 쓸데없는 소리 하면 " 헛소리" '뜬 구름 잡는 소리"로 분류해서 집에 오면 복기했다.


처음엔 세상 물정 도 모르고 헛소리만 계속하며 산 것 같다. (얼마 전에 교포 친구 만났는데, 그도 한국 초짜라 자기 하고 싶은 아무 말이나 막 하길래 "짜식, 공부가 필요하군" 속으로 웃었다) 옛날 오래된 친구들이 옛날 모습이 아닌 것도 알게 되었다. 관계가 이어지지 않고 오래 있으면 인맥은 의미가 없다는 것, 자기 이익에 보탬이 안되면 밥 한 끼 먹고 헤어지는 것도 알았다. 오래된 많은 친구들은 삶에 대한 고민 없었다. 대신 생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건강, 음식, 노래, 여행, 자연인, 시끄러운 정치, 약자의 슬픔, 더 커진 외침.


높아진 한국에서 내 눈치도 꾸준히 점점 높아졌다. 원래 내가 구십구단이니까 나머지 일단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웬만해서 말을 안 하면 된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속이 새까만지 하얀지 모른다. 바로 그때 잔머리를 팍팍 돌리면 된다. " 너, 다 커서 미국 갔잖아? 그것도 몰라?" "우리나라 이젠 선진국 부자야. 코로나 보라고 미국 하는 거, 너도 잘 생각하고 빨리 줄이나 잘 서."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는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는데 벌써 최고라고 생각하는구나. 이런 분들이 미국에 놀러 오면 베트남인 줄 알고 설치겠구나. 사실, 눈치 없는 것들.  슬펐다.


나는 여기 와서 더 이방인이 되었다. 마스크 한가득, 좋은 기억만 한 움큼 가방에 욱여넣고 눈치 1단 올려 "스스로 백 단"되어 돌아간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사랑하는 이가 있는 이곳을 몇 번 더 오겠지 아마 일 때문에 또 길게 올지 모른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내가 안 본 동안 눈치 이백단이 되었다. (백구 십구단이었는데 요양원 눈치 일단이 더 붙었다.) 눈치는 이백 단 이라 하나 내가 코로나 때문에 요양원에 방문하지 못하고 "빨리 다녀올게요" 했는데 지금 미국 어떠냐고 하신다. " 저 아직 한국이에요, 다음 주에 떠나요" " 아, 그래?"기억이 약해지셨다.

어쩌면 어머니 돌아가시고 울면서 올지도 모른다.


미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한국에서 배운 눈치 백 단증은 버릴 거다. 

전기가 110V 듯 여기 전자제품은 버리고 살아야 한다. 눈치 안 보고 옛날처럼 그냥 나대로 살란다. 

다만 상식과 교양, 지성으로 탐구하는 삶의 고뇌는 남겨두고.


한국이 안녕, 반갑고 고마웠다. 눈치여 안녕, 다음엔 보지 말자.



            

https://youtu.be/asKrPIQD3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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