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배워 갑니다.

by 강노아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눈치 고수들이 모여사는 집단이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고 아주 오래전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외삼촌도 그렇다. 유명해진 그를 공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때 유력인사들 식사자리에서 "우리 집안이 눈치가 백 단인데, 허허허" 농담 어린 진담을 분명히 들었다. 내가 장남이라 유전적으로 어머니 특징을 좀 더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녀 눈치를 유전받아 출생 직후 이미 십단 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 눈치 없고 융통성도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어려서도 이모가 사 온 옷이 맘에 안 든다고, 가져온 수박이 맛없다고 해 꾸중을 많이 들었다.

"그냥 고맙습니다 하는 거야"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 똥수깐은 수세식이 아니고 푸세식(뒷간의 방언, 우리는 똥투깐이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으로 냄새도 많이 나고 학교 본관 멀리 바깥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여덟 살 때쯤인 것 같다. 그날 어머니는 반바지에 파란 양말을 신겨주었다. " 싫다고,...... 신으라니까, 괜찮아" 나는 그때 색이 있는 양말을 무척 싫어해 간절히 저항했지만 어머니가 이겼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센스 있는 의상실 엄마 코디로 반바지에 짙은 파란색 양말을 발목까지 올리고 어색하게 등교했다. 아이들은 나만, 아니 내 발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럭저럭 재미없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 그거 알잖는가? 설사도 아니고 대장 속 거시기가 익어 가득 찼을 때 찾아오는 쾌감 섞인 진통, 그놈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화장실에 갈 수가 없었다. 우선 평소 같지 않은 내 양말 색 때문에 친구들이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며 놀렸고 (그들은 파란색 양말도 없는 놈 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왕따는 아니었다. 성질 있어서, 붙으면 다 부셔 이겼다.) 그 아이들은 화장실 가면 따라와 장난 칠게 분명했다. 또 하나, 나는 화장실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똥투깐에는 귀신이 살아서 사람 없을 때 앉아 일을 보면 똥 묻은 귀신 손이 쓰윽 올라와 "내 불알 내놔" 한다는 그 말.


수업이 끝나갈 무렵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참아도 참아도 감당하기 곤란했다.

마침내 수업 중에 손을 번쩍 들었다. 갑자기 그러자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며 "뭐?"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으로 배를 가리키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는지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라고 신호한다.

이 팬터마임의 음성 소거를 소리 나게 하면 " 선생님!" "뭐?" "똥 마려워요" "갔다 와" 이런 거다.

나는 정말 우리 집 강아지 코카스파니엘처럼 달렸다. 코카는 무진장 빠르다. 코카 이 배신자 놈이 지난번 목줄 놓치자 도망가며 뛰는데 거의 배달의 기수 오토바이만큼 빠르더라. 수업 종료가 거의 다 되어서 종례를 건너뛰고 집으로 도망가려 가방 들고 똥투깐으로 목줄 놓친 코카처럼 달렸다. 달리는데 옛날에 친구들이 화장실 벽 타고 올라와 천장에서 야릇한 미소로 쳐다보던 얼굴, 문 열라는 외침에 잠금고리 없던 화장실 문을 손으로 꽉 잡고 버티며 일 보던 생각 등이 빠르게 스치며 지나갔다. 게다가 똥투깐 바닥에 똥 묻은 손이 올라오는 상상이 강림하자 나는 화장실로 뛰다 방향을 바꿔 바로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를 생각하면 그대로다)


뱃속은 투하할 무거운 폭탄을 가득 채운채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거리의 집으로 막 뛰기 시작했다. 폭탄은 점점 아래로 아래로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10,9,8,7,......" 참고 또 참았다. 참으려고 찬송가를 군가처럼 불렀다. "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군가처럼 불렀다.(난 어린이 성가대 솔리스트였다)


찬송가 덕분인지 신이 친구 되어 주신 건지 기적이 일어났다. 똥 폭탄이 발사 카운트 3초를 남겨놓고 멈추었다. 생각이 멈춘 건지 괄약근이 힘을 쓴 건지. (나중에 자라서 군대 훈련소 새벽 구보하다 샛별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 노래 부르다 어릴 적 생각나서 피식 웃었는데 따로 불려 나가 죽도록 맞은 기억도 난다. 걔네들은 왜 맨날 건수 잡아 때렸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 때리던 사람이 별도 달더라 ) 아무튼 집에 들어서자마자 의상실에서 재단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대뜸 소리 질렀다.


엄마~

신기하기도 하지 엄마는 눈치가 백 단이라 내가 똥 마려운 것을 어찌 알았는지 선생님처럼 고개만 까닭이며 가게에서 가장 가까운 부엌으로 가라고 눈짓하였다.

" 똥 마려워? 학교에서 하고 오지"

나는 급하지만 대답했다. " 나온것 같애"

" 바지 내려봐" 순간 엄마는 수술실 간호사 같았다.


아~ 바지를 내리는 순간 폭탄은 아주 굵고 아름다운 황금색 구렁이로 변신하여 쑤~욱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


난 이제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깔끔한 어머니는 불량식품 "달고나" 몰래 먹고 들어 오면 "어떻게 알았지?"바로 눈치 백 단으로 체포하여 어디서 왜 그걸 먹었는지 취조하고 " 달고나를 먹었습니다 " 세 번 복창시키고 자 막대기로 가볍게 입을 세 번 때리며 "다시 몰래 먹으면 진짜 맞는다"하던 분이다. 부엌의 똥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실까? 능구렁이 한 마리가 끊어지지도 않고 부엌에 다 나왔다. 건강하고 튼실한 녀석이 태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 바지 다 벗어" 어머니는 엉덩이를 까고 뒤처리하더니 똥 묻은 바지와 속옷을 대야에 넣고 반나체의 내 손을 잡아 근처 맑은 개울에 데려갔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서울인데 개울도 흐르고) 그곳에는 빨래하던 이웃 아낙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정말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내 엉덩이를 차가운 개울물에 담가 박박 씻었다.


긴 침묵 끝에 " 앞으로 또 그러면 학교에서 꼭 하고 와 알았지?"

"네......" 나는 친구들의 화장실 괴롭힘과 똥투깐 귀신 이야기는 아직도 하지 않았다.


똥싸개 아이는 그렇게 무럭무럭 자랐다.

한국에서 대학원 마치고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그 아이는 눈치가 백 단을 넘지 못했다. 가족들은 살면서 눈치가 없다고 자주 핀잔주었다. 난 어쩌면 눈치 구십구단으로 미국에 살았다.(일단 바보는 아니니까)


미국은 참 달랐다. 눈치 단증이 필요 없었다. 필요하면 달라하고 뭐 좀 마실래? 아니, 그러면 안 준다. 속마음을 말하고 상대는 진지하게 듣고 문제는 자기 일처럼 진지하게 대화했다. (적어도 내가 만난 미국인들) 고개를 까닥이고 그 속에 함의된 것을 눈치로 알아맞힐 필요가 없었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들으면 "쉽게 다시 말해줄래?" 그러면 아주 쉽게 다시 말해준다. 그리고 꼭 덭붙이는 말 " Do you know what I'm saying?' " you follow me?" 확인까지 해 주었다. 미국에서 내 구십구단 눈치는 점점 더 내려갔다. 아마 한 이십 단 정도면 살만했다. 게다가 난 군에서 방심하여 귀마개 안 끼고 권총사격 하는 바람에 이명 증상으로 한쪽 청력이 매우 약해졌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영어가 제대로 들릴 리 없고 한국말로도 대화중 자주 못 알아들어 딴소리할 때가 많았다. 좌중은 자주 나 때문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난 잘 안 들리는데.


그러다가 최근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세상에, 이십 년 넘게 떠나 있던 낯선 한국 살람은 눈치가 전부 백 단이 넘었다. 그걸 금방 깨달았다. 아주 빨리 눈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상대의 마음을 말하지 않고 읽어야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떤지 짐작하고 다음 말을 해야 하고 쓸데없는 소리 하면 " 헛소리" '뜬 구름 잡는 소리"로 분류해서 집에 오면 복기했다.


처음엔 세상 물정 도 모르고 헛소리만 계속하며 산 것 같다. (얼마 전에 교포 친구 만났는데, 그도 한국 초짜라 자기 하고 싶은 아무 말이나 막 하길래 "짜식, 공부가 필요하군" 속으로 웃었다) 옛날 오래된 친구들이 옛날 모습이 아닌 것도 알게 되었다. 관계가 이어지지 않고 오래 있으면 인맥은 의미가 없다는 것, 자기 이익에 보탬이 안되면 밥 한 끼 먹고 헤어지는 것도 알았다. 오래된 많은 친구들은 삶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대신 생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건강, 음식, 노래, 여행, 자연인, 시끄러운 정치, 약자의 슬픔, 더 커진 외침.


높아진 한국에서 내 눈치도 꾸준히 점점 높아졌다. 원래 내가 구십구단이니까 나머지 일단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웬만해서 말을 안 하면 된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속이 새까만지 하얀지 모른다. 바로 그때 잔머리를 팍팍 돌리면 된다. " 너, 다 커서 미국 갔잖아? 그것도 몰라?" "우리나라 이젠 선진국 부자야. 코로나 보라고 미국 하는 거, 너도 잘 생각하고 빨리 줄이나 잘 서."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는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는데 벌써 최고라고 생각하는구나. 이런 분들이 미국에 놀러 오면 베트남인 줄 알고 설치겠구나. 사실은, 눈치 없는 것들. 슬펐다.


나는 여기 와서 더 이방인이 되었다. 마스크 한가득, 좋은 기억만 한 움큼 가방에 욱여넣고 눈치 1단 올려 "스스로 백 단"되어 돌아간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사랑하는 이가 있는 이곳을 몇 번 더 오겠지 아마 일 때문에 또 길게 올지 모른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내가 안 본 동안 눈치 이백단이 되었다. (백구 십구단이었는데 요양원 눈치 일단이 더 붙었다.) 눈치는 이백 단 이라 하나 내가 코로나 때문에 요양원에 방문하지 못하고 "빨리 다녀올게요" 했는데 지금 미국 어떠냐고 하신다. " 저 아직 한국이에요, 다음 주에 떠나요" " 아, 그래?"기억이 약해지셨다.

어쩌면 어머니 돌아가시고 울면서 올지도 모른다.


미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한국에서 배운 눈치 백 단증은 버릴 거다.

전기가 110V 듯 여기 전자제품은 버리고 살아야 한다. 눈치 안 보고 옛날처럼 그냥 나대로 살란다.

다만 상식과 교양, 지성으로 탐구하는 삶의 고뇌는 남겨두고.


한국이 안녕, 반갑고 고마웠다. 눈치여 안녕, 다음엔 보지 말자.



https://youtu.be/asKrPIQD3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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