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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Jul 30. 2020

영화 첫 잔처럼

 작가라면  반드시

영화에서 느낀 그것이 사라질까 두서없이 글에 무작정 들어섰다.  


작가와 감독, 배우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무한대로 있으니 독자에게 숙제로 주고, 영화에서 느낀 첫 감흥을 고스란히 살리고 싶어 날것으로 쓰려고 작정한 셈이다. 늦은 감 있지만 작가라면 반드시 보고 지나가야 할 것 같은 영화라서 굳이 소개하고 싶었다. (영화 첫 잔처럼 다시 보기를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는 숭늉 같다. 

돌솥밥 지어주는 식당에서 밥을 푸고 남은 그릇에 물을 가득 부어 식사를 마칠 때쯤, 마지막 입가심 하는 심심한 맛, 영화에서 그 맛이 난다. 인생이 어쩌면 우리에게 특별하지도, 뭐 그리 대단한 목적도 없듯 영화도 특별하지 않은 밍밍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이 조금 나이 들어 제일 먼저 찾는 것은 삶의 의미나 목적 같은 것이다. 최근 어떤 기사에  AI가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대답을 내놓은 것을 보며 기계도 점점 나이 들어간다고 느낀다. 삶의 의미도 신의 존재 유무처럼 인간이 가장 찾고 싶어 하는 명제 아닐까? 조금 더 성숙해지면 삶은 신의 유무만큼 답이 없다는 벽을 발견하게 되고  그 벽 앞에 주저앉는 날이 온다. "이제 뭘 더 해야 하지?" 그렇게 물끄러미 삶을 관조하면 그때 보이는 것은 삶이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삶의 심심한 맛을 찾는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은 빅뱅(현재 지식으로)이래 시간이란 굴레에 갇혀 생명체로 나고, 살고, 죽기가 숙명인지라 과거, 현재, 미래를 셈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 우리는 현재를 가장 무시한다. 미래는 언제나 그렇듯 없는 것을 호의적으로 상상하며 꿈이나 희망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기다린다.  과거는 어떤가? 기억이 처리할 수 있는 역량만큼 최대로 아름답게  포장하여 흑백으로 때로는 총천연색으로 소중하게 보관하고 (때론 과거로 고통받고) 아무 때나 꺼내 보며 눈물짓기도 하고 미소 짓기도 한다.


현재는 이거 뭐 마당에 키우는 관심 밖의 똥개다. 미래를 만드느라 쳐다보지 않고, 과거를 들쳐 보느라 시간이 없다. "현재는 일단 달리고 보는 거야 그것을 최선이라 부르지" 이렇게 결심하고 무심하게 보내 버린다. 죽을 때쯤 과거가 되어버린 그때의 현재를 소환해서 후회하지만 어쩌나, 현재를 날려버린 책임은 무지한 당신에게 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조금 깨우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를 잘 즐기려면 잘 놀고, 잘 쓰고, 여행하고 즐기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더 깨우치면 더 알게 된다.


영화는 주인공 호연이(조달환 역)가 직장에서 살아남으려 치열하게 사는 "매운 현재"를 그린다. 그러나 마지막 잔을 통해 떠나보내는 호연의 전 대표이사 문상에서 그가 술잔을 기울이며 고인 미망인이 권한 국밥 한 그릇을 비울 때 한숨짓는 회한을 통해 인생은 죽음이란 다행스 브레이크 때문에 숭늉 맛 나는 것 임을 알게 해 준다.      


이 영화는 문학이다.

평범한 삶을 챕터와 내레이션으로 꾸미는 바람에 영화가 문학으로 진입했다. 영화작가는 영리하게 문학의 구성을 빌려 영화에 차용했다. 글이란 본래 독자가 읽으며 작가가 글에 새겨놓은 영상을 추론하기 마련인데 영화는 영상을 통해 할 수 있는 작업을 다 해놓았기 때문에 인스턴트 음식 같을 수 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야구중계를 볼 때 시청자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만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문학은 무한한 창작이 독자의 무한한 상상과 만나
예측 불가한 새로운 무한을 창조하는 힘이 있는데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챕터로 나누고 내레이션을 주된 동력으로 삼자 영화는 책을 읽는 느낌을 주었다. 나는 영화를 보다가 몇 번씩 멈추었다. 내 버릇 이기도 하지만 내 한계점을 넘어서는 레벨의 작가를 만나면 잠시 멈추는 습관이 있다. 글을 읽다가도 차원을 달리하는 표현을 만나면 입술을 실수로 씹어 비릿하게 느껴지는 피맛을 입안 가득 느끼며 잠시 멈춘다. 멈춤의 의미는 패배감이기도 하고 그런 표현을  써 내려간 "작가에 대한 경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나는 자주 멈춰 있었다.       


영화는 술과 안주, 라면을 끝까지 붙잡고 간다.

라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라면을 꼭 쥐고 간다. 후반부에 라면 끓이는 것 보고 잠시 멈춤을 걸고 결국 라면을 따라서 해 먹고 말았다. 결과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다. 그건 국물을 싫어하는 나 같은 고혈압 환자에겐 비추 레시피다. 혹시 영화를 보고 따라 하지 마시라. 물론 국물채 들이켜는 사람이면 뭐 나쁘지 않고, 나는 애정을 담아 권고한다.


물은 550ml 지키고 처음에 물은 반만 넣고 라면과 수프를 끓이다 조금 끓으면 나머지 물을 붓고 끓여라. 그렇게 해도 면발이 쫄깃해진다. 그리고 면을 젓가락으로 들었다 놓았다 해도 공기와 닿으면서 쫄깃해진다.  다 익기 전에 조금 일찍 불을 끄고 그때 파를 넣고 식초 두 방울 고춧가루 아주 조금과 달걀을 넣고 노른자는 스푼으로 건져서 덜어먹을 그릇에 놓는다. 냄비 열로 조금 익게 기다리고 (30초) 노른자 덜어놓은 그릇에 라면을 건져서 얹고 드시면 국물 없이 라면과 노른자의 조화를 맛보실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렇게 먹는다. 노른자 푼 국물 다 들이켜지 않는다. 그렇게 먹으면 국물을 다 마시든가 달걀을 낭비한다. 아무튼 영화는 술이 맛있어 보이게, 라면이 끝내줄 것 같게, 생선회가 좋은 요리사를 만나면 미칠 것 같게 느낌을 잘 담았다.     


배우 조달환 연기에 경탄과 박수를 보내며 이 영화 꼭 보시기 바란다. 나는 너무 좋았다.

 

시간에 기대어 -바리톤 김주택

https://youtu.be/GO8M3BBnb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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