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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Sep 24. 2020

삶의 퇴고

변태 Metamorphosis

퇴고하면서 늘 드는 생각이  "첫 글은 힘이 있으나 세련되지 못하고 두서가 없다"는 점이다.


모두 그렇듯 글을 고치다 보면 처음 생각은 계절처럼 변하고 처음 말투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내가 나를 고치는데 허물고 다시 세우고 내가 아닌 내가 글을 진흙으로 빚는다. 창조 놀이다.  


글을 고치다가 "삶도 퇴고하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삶은 이미 출판된 책 같아 고칠 수 없지만 "지금 여기"는 삶의 퇴고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통퇴고

타인과의 소통하는 방법을 퇴고하듯 고칠 수 있을까?

나는 꼼꼼하고 분명한 성격이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상대할 때 (가족을 포함해) 나의 초고는 항상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편이다. 돌이켜 보니 그런 성향의 나는 자기 관리 (정신 및 물리적 영역까지)가 부족한 사람에 대해 편견과 평가를 늘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집안 대대로 눈치가 백 단이라 작은 언행 하나로도 상대를 기막히게 알아보는 기민한 능력? 때문에, 어김없이 덜커덩 튀어나오는 말은 "지적질'이다. 내 지적질은 공격적이고 그 속엔 비난을 숨겨 놓았다. 내 지적질은 상대가 최소 눈치 십 단만 넘으면 즉시 불쾌해지는 효력을 발휘한다. 최종적으론 관계의 긍정적 변화가 아니라 불편한 관계로 암묵적 저항의 침묵만 남긴다.


"지금 여기" 이승이란 곳에 가장 힘든 것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일"이다.

돈 때문에 고용인 employee은 고용주 employer에게 많은 것을 자진해서 포기하고 살지만 무상으로 살아가는 가족은 고용인으로 하루를 겪은 가장의 스트레스 대상이 되어, 집에서 고용주가 된 그의 퇴고 없는 삶의 초고를 오물처럼 뒤집어쓰고 매일 미숙한 그의 삶을 읽어야 한다.


어쩌면 나도 지난날 가족 혹은 가까운 사람에게 마구 마구 무력으로 퇴고 없는 삶의 초고를 거칠게 출간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것은 상처가 되고 갑의 가해자는 "미안해" 한마디로 슬쩍 넘어가려 하지만 을의 피해자는 머릿속 상처가 아물 때까지 덫나기를 반복하며 끝없이 지우고 또 지운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아 지우고 내 아이들은 내게 상처를 받아 아직도 해독한다. 그것이 못난 삶의 초고로 살았기 때문이다.  퇴고하듯 한 번만 더 생각하면 부드러운 말로, 부탁하는 말로 타인에게 전달하고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자기감정이 입 밖으로 뛰쳐나와 망나니 칼춤을 추며 살지 않았나... 그런 것들이 바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이 자행한 삶의 미숙한 시절이다. 아주 잠깐이라도 한 번 더 독자를 생각하듯 상대를 생각해 말하면 최소한 오자와 탈자가 줄어든 문장 같은 삶의 문장은 읽을만할지 모른다.  




미국 생활 재적응을 마친 것인지, 아니면 삶이 지루해진 것인지 미국 지인들을 아 통화를 나누었다.

" 뭐야, 도대체 왜 그렇게 오래 연락이 안 된 거야? 죽은 줄 알았어" " 어, 여차 이차 삼차 합이 오차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미안해요" 지인들의 투정이, 반김이 그저 고맙고 좋다.


그러다 친구의 부고를 접했다. 죽은 줄 알았던 나는 살아 돌아왔고 멀쩡했던 그는 죽었다. 서부로 이사 간 후 그동안 연락 없이 지내던 귀한 동기였는데 정말 죽었다. 기가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직 젊은 나이고 아이도 늦게 가져 어린데 부인은 어떡하고... 내가 얼마 전 미국 돌아오느라 정신없을 때, 소리 없이 암 투병하다 내가 짐 풀고 "미국 어떠네 한국이 어떠네" 수다 떨고 앉아 있을 때, 그는 마지막 호흡을 몰아쉬며  호스피스 병실에서 자주 보던 그 호흡을 토하다 이승을 떠났다.


친구와 연락 없던 시간이 꽤 길어서 그의 죽음 앞에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유학 먼저 오고 한국에 잠시 나간 사이 친구는 이민을 먼저 들어왔었다. 내가 미국 이민생활을 시작할 땐 여러모로 친구의 도움이 꽤 있었다. 하지만 나와 성격이 너무 달라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멀어졌고 이사 간 후에 서로 소식 모르고 지내던 그가 지난달 나 모르게 세상을 등진 것이다.


 "안됐어, 하지만 어째, 죽은 사람 얘기 그만하고 산사람 이야기합시다. 그래 한국 간 일은 어떻고?"


그때 내가 한국에서 뇌경색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아주 죽어서 가루로 돌아와도 그들은 그럴 것이다.


"그래? 어쩌다가, 안됐어, 아직 젊은데"


그래 우리 목숨 값은 이 정도다. 여섯 글자 "아이고 안됐어"


우리는 병원 요람에 환영받으며 누워 다 장의사 요람에 환송받으며 누워 간다.


고인이 된 친구는 인품도 훌륭하고 성격도 좋아서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 좋아했다.  이 친구 떠나니까, 그때 내가 친구에게 삶의 초고로 들이대지 말고 지금처럼 퇴고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지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각성하니 더 아쉽고 더 억울하다. 그래서 나는 어제부터 지금 새벽, 밤새 잠 못 이루다 친구의 죽음을 씹고 또 씹어 되새김질하며  관에 누워 하객 인사받는 장례식 동영상 속 그를 보고 또 보고 되감아 보다가 조용히 오랫동안 눈물 흘렸다.


죽음은 언제나 아프다.     


저명한 죽음 스승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나비를 상징으로 장례를 치른 것처럼 나비는 변태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고치고 지우며 삶을 퇴고하고 아름다운 잠깐으로 태어 났을까?


나도 나비처럼 삶을 퇴고하며 변하고 또 변해 아름답게  날아오를 수는 있을까?


https://youtu.be/ZTcAqLexC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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