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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Sep 29. 2020

혈압약 끊으며 발견한 집착과 소유

뇌졸중 경험한 사람이 혈압약을 끊어 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언뜻 가미카재 kamikaze특공대 같아 보인다.


의료계에 종사하는 친구들과 한국에서 의사 일하는 형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왜? 미국에 혈압약 구하기 힘들어? 여기서 보내줄까?"


그 사람들, 규정 위반하고 약 보낸다고 연락 올 것이 뻔해서 장고를 거듭 한 끝에 혈압약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약도 안 먹고 혈압관리도 안 해서 응급실로 실려가는 낭패는 없어야 한다. 미국 의료 시스템에 슬쩍 기댔다가는 평생 빚에게 목 졸림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뇌혈관이 터지면 죽을 수도 있다. 아니 죽으면 다행인데 불구로 살아남기는 더욱 싫다. 게다가 요즘 여기 친구들 하나 둘 암으로 죽어가는 판국에 나마저 머리 터져 죽었다는 병명을 부고로 알리기는 더더욱 싫다.    


사실 혈압약을 대충(몸속 기생충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는 바로 그 대충) 복용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적극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서 뇌출혈 터지고도 기사회생해서 목숨 건진 다음부터였다. 그때 한국에 내과의사 형은 정성껏 혈압을 관리했고 그것은 내과답게 다양한 약을 무한대로 공급해 주는 것이었다. 혈압약은 부작용이 있었다. 남성기능 장애와 신장에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혈압 태만도 모셔왔다. 약 때문에 정상혈압이라 착각해서 혈압에 안 좋은 행위들을 뻔뻔하게 자행하며 산 그것들이다.


고혈압의 원인은 모두가 아는 대로 스트레스, 짠 음식, 운동부족, 비만, 술 담배 등이다. 나는 고혈압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약 만 믿고 살았다. 그러던 내가 이런 결심을 하면서부터 혈압 공부를 시작했고 그 와중에  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는 혈압계 최고위층에 계신 혈압 왕이다. 

건강하실 때도 혈압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사경을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그때마다 저혈압 아버지는 고혈압 어머니에게 늘 조심하라고 나무랐다. 고기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나물 좋아하던 어머니에게 나물 양념이 짠 거라며 성화를 부리시더니 정작 자신은 가볍던 기침이 점점 중해져 응급실에 입원했다가 패혈증으로 요절하셨다. 반면,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것 같던 어머니는 골골 백 년이라고 아주 맑은 정신으로 한국의 시설 좋은 요양원에서 장수하시는 중이다.


어머니 고혈압은 내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전엔 몰랐는데 어머니 혈압의 주된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또한 어머니 스트레스의 원인은 예민한 성격이었다. 이 예민한 유전자는 역시 은밀하게 내 속에 기어 들어와 내 마음에 좌판을 깔고 들어앉았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조용하고 한없이 어진분인 줄 알았다. 의상실을 경영해서 아버지보다 수입이 많은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던  어머니는 사실 한 성질 하는 분이었다.


 "카탈로그 catalog에 나온 것과 옷이 다르잖아요?"
"아이 참, 카탈로그 catalog는 모델이 입었고 지금은 아주머니가 입으니 달라 보이지만 잘 나왔어요"


손님이 극구 옷을 잘못 만들었다며 항의하자 결국 어머니는 분기탱천하여 환불해 주고 의상실 뒤편, 집 뒷마당에서 옷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버렸다.  한 성질 하는 어머니의 창의적인 낯선 분노 표현 방식이었다. 어린 나는 "손님이 못돼서 우리 엄마 화가 많이 났구나"라고 생각하며 어둠이 막 시작 무렵, 활활 옷 타오르는 장면과 매캐한 화학 냄새가 분노를 화형 시키는 모습이라 생각하며 말없이 바라보던 적이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평생 참고 살았지"어머니가 요양원에서 고백했다.

" 나는 솔직히 음식도 잘 못했어" 아들에게 "툭" 내뱉는 고해성사는 또한 나의 과거 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 예민함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남겨 주었고 나는 그것을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었다. 





미국에서 처음 집을 사고 이사 간 새 집에, 학교와 거리가 멀어져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 하는 둘째가 알람을 맞추려다, 껐다 켰다를 수십 번 반복했다는(강박증) 그 말. 과거를 추적해 보면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신경증에 시달리는 것도 모르고 무심하게 넘어간 기억들이 조각조각 수류탄 파편처럼 몸속에 남아 통증 phantom pain을 다시 느낀다.  큰 애는 시카고에 대학 들어가서 방학 때 말고 한 번도 함께 살지 못했는데 시간만 바뀐 지금 시카고에서 보니 강박증도 있고 고혈압 환자다. 이 동네 추우니까 추울 때 혈압 조심할 것을 간절히 말해도 당해보지 않아 고혈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모른다.    




결국, 혈압약을 효과적으로 끊기 위해 혈압계를 새로 구입했다.

집안에 혈압계가 아들 것 까지 총 네 개다. 혈압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도 열심히 공부했다. 혈압약을 끊었을 때의 부작용과, 의사들 마다 제각기 다른 혈압약에 관한 관점의 차이 등.


공부를 마치자, 혈압약은 "관리 잘하는 전제"로 끊을 수 있고, 고혈압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넷서핑 net surfing 중에 이런 글을 만났다.
스트레스는 힘든 삶, 쉽게 살기를 하면 됩니다.

똑같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쉽게 그리고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지요. 바로 그들을 따라 배우면 됩니다.  예민한 몸맘은 약간의 스트레스에도 혈압이 많이 오르고, 보통에도 혈압의 변화가 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몸맘을 둔감하게 만드는 둔감 훈련을 해야 혈압이 정상이 됩니다. 둔감 훈련은 자신을 민감하게 하는 상황에 여태껏 했던 것과 반대로 행동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부러 어질러 놓고 살기, 약속시간 어기기, 일부러 져주기, 욕먹을 짓 해보기, 지저분한 화장실 사용하기 등이지요. 이 훈련이 사회적으로 옳다거나 성격을 바꾸거나, 일생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2주에서 1개월만 한시적으로 시행하면, 몸이 둔감해지고 이에 따라 마음도 덜 민감하게 됩니다
(KBS World radio 고혈압 3개월에 완치하기 2014.4.26)

둔감 훈련은 나보고 죽으라 소리다.
또 다른 글도 있었으니,

꽉 찬 공허, 텅 빈 충만

소유물에 대한 애착의 극단적인 형태가 저장장애 (hoarding disorder)다. 일단 내 소유물이 된 물건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더라도 결코 버리지 않고 집안 어디엔가 쌓아두는 행동이다. 이렇게 집안에 물건이 점점 늘어나다 보면 나중에는 걸어 다니기도 힘들 지경이 되고 잠 잘 공간도 없어 쪼그리고 잔다.  
연구결과 성인의 4~5%에서 다양한 정도의 저장장애를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불안 애착형의 경우 비율이 더 높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정도면 중증이지만 사실 ‘경증’ 저장장애를 보이는 사람은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쩌면 나 자신?). ‘양의 탈을 쓴’ 저장장애의 하나가 ‘책 저장장애(bibliomania)’다.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집안에 책이 많으면 ‘독서가 취미인 지적인 사람’이 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책장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거나 같은 책이 여러 판본 있다면 책 저장장애를 의심할만하다.
저장장애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놀랍게도 고치기 어려운 강박증상으로 인지행동요법 등 다양한 치료법을 행해도 불과 35%에서만 뚜렷한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이 수집한 물건들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 날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를 버린다는 걸 견디지 못한다. 물론 그럴 날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장장애가 있는 사람의, 온갖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 없는 방은 한 마디로 ‘꽉 찬 공허’의 공간일 뿐이다.  ([강석기의 과학카페] 마음이 허(虛)하면 소유물에 집착한다  2018.05.22)


둔감 훈련, 언젠가는 쓰일날이 있을 거야, 처음 주목하는 단어들이 화살촉 박히듯 푹~ 하고 심장에 꽂혔다.

솔직히 나는 심각하게 예민하거나 병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혈압약을 끊으며 내가 이 부분에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집착과 소유

내가 한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미국에 들어올 때였다. 물건을 정말 많이 줄이는 바람에 한편 홀가분하고 의기양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쓰던 물건들이 없어도 미국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최소한이라는 남겨진 것들로 생활에 지장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은근슬쩍 아마존 질 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마존 배달 기다리는 재미가 이렇게 좋은 지도 처음 알았다) 결국에 물건을 줄인 만큼 여기서 다시 사고 있었다. 한국에 또다시 나가면 이것들 어떻게 보관하지? 고민하면서 더 다양하고 더 값싼 품질 좋은 미국 물건들에게 점점 빠져 들고 있었다. 오늘도 홀푸드 마켓 Whole food market (유기농 제품 중심으로 품질이 아주 좋은 물건을 가진 곳이다)에서 주체할 수 없는 소유의 기쁨을 느끼면서 내 것으로 소유하고 내 마음대로 소비하고 내가 지배하고, 사고 싶은 것을 반드시 사고야 마는 짓거리를 하며 나의 심리적 특징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난 평생 내 맘대로 하고 살았다.  소유하고 지배하고 엘리트 elite의 삶을 유지하고 즐기면서 겸손하다며 자기를 내려놓았다고 착각했었다.




한국에서 지인 소개로 알게 된 젊은 한의사가 진료 얼마 뒤  "혈압을 내리려면 자신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라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색하고 말했다.( 말장난 같아서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누구에게나 하는 말인지, 나에게 특화된 말인지 내려놓으시라고 자. 내심 욕심도 없고 순수한, 내려놓을 것도 없는 내게 뭘 그리 내려놓으라는 건지, 여동생 개가 공 물고 가져올 때 잘 안 주면 "내려놔 내려놔" 하던 생각이 오버랩되어 뻘쭘하게 혼자 참 많이 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내 관상을 본 것이다. 허준처럼 본 것이겠지, 열이 많고 기가 머리 위로 올라와 있다고 나를 진단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영특한 그 친구는 내 기질을 파악한 셈이다.


완벽주의, 사물과 디자인에 대한 섬세한 이해, 균형이 무너진 구성을 귀신처럼 찾아내는 감각, 결국 이 예민한 감각들이 최선의 작동을 하려면 난 쥐고 있어야만 했다. 감각들을 내려놓으면 절정의 예술이나 초절정의 엑스타시 extasy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문학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문장이 가진 내구성(책이 되어 남는)과 활자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소리 같은 매력을 느껴서 이기도 하다. 이런 "모~오~든 것"을 내려놓으란다. 내려놓고 백치 아다다가 되란 말인지, 요즘 감정 없는 청년처럼 무정하게 타인을 상대하고 로봇처럼 살라는 건지 도통 곤란했었다.


이젠 집착과 소유만 내려놓으려 한다. 

예민함 중에 휘발성과 폭발성만 내려놓으면 그래도 감각은 유지하며 혈압 따위가 생명을 위협하는 일은 줄어들 테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 이 글을 쓴다.

혈압약 끊고 아직 불안하지 않게 일주일을 살아가는 중이다. 3개월쯤 뒤에 이 주제의 결과를 다시 쓰면 좋겠다.




대학시절 첫 미팅하며 듣던 노래가 FM Radio에서 흘러나온다. 어디서 듣던 거지?

아! 생각이 나서 찾았다. 노래 듣고 혈압 재보니 정상에 가깝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128/86


사랑의 찬가

https://youtu.be/2SnvSoPJz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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