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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Feb 10. 2021

창밖의 세상

" 이거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 아뇨, 당신이 먼저 드세요"


 소나기가 세차던 어느 날, 어린 소녀와 어린 나는 대문 앞 아주 큰 우산 속에 쭈그리고 앉아 살림을 차렸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둘은 본능적으로 부부가 되어 흙으로 밥을 지어 구색을 갖춰 식탁을 차리고 플라스틱 그릇들은 죄다 모아 소꿉장난하고 있었다. 그때 그 기억은 나이 들어 뇌 주름 어딘가 소녀의 얼굴만 빼고 우산, 소나기, 소꿉놀이 등의 제목으로 명료하게 저장돼 있었다. 그 기억의 여파로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을 때 쯤에는 내가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고, 소나기 피한 원두막과 비가 새 다시 찾아간 수숫단 속엔 어릴 적 우산 속 그 소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세월 지나 어른되어서도  또 소나기만 내리면, 나는  잠시 자동차를 멈추고 와이퍼마저 끈채 기어코 우산 같은 자동차 천장을 요란하게 내리치는 소나기의 기개와 빗살의 따가운 장단을 그렇게 즐기곤했다. 사무실과 집에서도 요란한 천둥번개가 하늘을 쩍 가르고 북과 꽹과리처럼 우두두두 쾅 소나기와 보조를 맞추는 날에는 그처럼 행복할 수 없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순진하게 깨어난 어린아이가 자신을 제법 소상하게 이해할
무렵, 나는 소나기가 아니라 우산 속 안전한 그곳을 더 좋아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단거리 국내선 비행 때 주로 창쪽에 앉는다.

하지만 장거리 국제선 비행할 땐 복도 쪽이 더 좋다. 그렇게 자리 잡고 앉으면 비행기는 긴 기다림을 뒤로하고 활주로에서 최고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공중 부양하려는 찰나, 목적지로 방향을 틀어 고도를 높이며 첫 선회 하는 순간, 소나기 내릴때 느끼던 얌전한 쾌감을 얻는다. 그리고 한참을 지루한 수평 비행하는 동안 일정하게 들려오는 엔진 소리는 안전한 어머니의 자장가 같은 백색소음이다.  내게 비행기는 우산속이다.


 " 외국에 사시면 비행기 자주 타시겠어요"


한국에 있을 때 단골 되어버린 미용실 디자이너 언니가 말을 걸었다. " 전 비행기 타는 게 재미있어요" " 어머, 저는 신혼여행 갈 때 해외 비행기 한번 탔는데 정말 힘들어서 죽을 뻔했어요" 모두가 비행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하기사 가끔 타야지 민항기 기장으로 평생 근무한 절친 선배는 얼마 전 아주 비행을 그만뒀다. "아휴 B747 탈 때 무거운 비행 가방 들고 계단 올라가 봐. 한참 올라가, 관절이 쑤셔서 이젠 이 짓 못하겠어." 선배는 이젠 아주 논다.  비행기 좋아하는 나는 가끔 전생에 생텍쥐페리였을 거라고 망상도 즐기지만 기장이 되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물론 의사가 안된 것도 행운이다. 두 개 직업이 중노동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디 가면 편한 직업이 있을까? 산에 사는 홈리스 자연인도 쉽지 않을게 자명하다. 자연과 친해지면 사람이 그립고 사람과 악쓰다 보면 자연이 목마르겠지.




 며칠 전 시카고 다운타운에 있는 한인마켓, H마트에 걸어서 갔다. 구글 맵에는 걸어서 2.3마일 50분이 나오는데 갈 때는 조금 돌더라도 미시간 호수를 산책한 뒤 이어 마트까지 걸어가고  올 때 버스 타고 오면 혈압에 좋을 것 같았다. 도심으로 들어서 마천루 윌리스 타워만 보고 그 밑을 따라 지나가면 되는 쉬운 길이라 그날따라 마음도 즐거웠다. 내가 사는 네이비 피어 근처에서 애들러 천문대까지 2.6마일이니 다해서 5마일 정도 걸을 수 있었다. 요즘 매일 걷고 있는 Lakefront Trail은 내가 시카고에서 제일 좋아하는 산책길이다. 바다 같은 미시간호, 오헤어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들은 연처럼 줄지어 하강하고 낮은 하늘엔 갈매기와 구스가 날고 건강한 사람들은 햇살 가득한 해변을 달린다. 고국에서 코로나에 감금된 여러분에게 군침 도는 곳이다. 그러나 그런 곳도 매일 걸으면 그저 그렇다. 이곳을 걷다 보면 바다의 끝은 인간과 닿아있고 하늘의 끝은 신과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누구에게는 버킷리스트고 나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걸어서 마트 속으로" 야심 찬 계획은 트레일을 마치고 도심에 접어들며 빗나가기 시작했다. 마천루 윌리스 타워가 너무 높고 선명해 도심 안에서도 잘 보일 거라 굳게 믿고 구글 맵을 틀지 않은 채 들어가서 그렇다. 후회할만한 오판이었다. 내가 길을 잘 찾아 사막의 여우라고 전쟁영웅 롬멜이 연상되는 똑똑한 사람이라 자부했는데 그날 사막의 여우는 도시의 유기견이 되었다. 시카고 다운타운은 옛것과 새것이 섞여있어 어김없이 옛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섭다. 그곳엔 까만색, 하얀색, 노란색, 누런색, 벌건 색 등 여러 인종이 등장한다. 나중에 비로소 휴대폰 지도 앱을 틀었지만 나는 자꾸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믿고 있던 마천루 윌리스 타워는 사라졌다. 멀리 있어야 도움이 되는 것은 가까우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태양도 그렇겠지) 남쪽으로 아니 북쪽으로 가야 해, 왜 화면은 빙글빙글 돌지? 가만히 좀 있어!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와우, 오늘 신기록을 달성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  " 다음 목표를 설정하시겠습니까?" 아, 이번엔 이놈의 만보계다. 내가 글에 사진은 잘 안 싣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날 인증 샷을 아래 담았다. 빙글빙글 도시를 돌고 돌아 간절히 고대하던 한국 마켓 뒤편 머리에 더듬이를 단 지상 108층 윌리스 타워(대문사진) 앞에 도착했고 낡은 건물에 그려진 사람처럼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길 잃은 관광객 인척 사진을 찍었다)    

           

시카고 윌리스 타워 부근, 낡은 건물에 그림이 압권이다.

고층빌딩 창문 너머에서 내려다보던 낭만도시는 우산 속에서 바라보는 소나기 치던 세상 같았다.    


 모레, 내 생일에는 특별히 나를 위해 한 가지를 계획했다. 시카고 최고 높이 윌리스타워 말고 야경이 더 유명한 존 핸콕 타워에서 칵테일 한잔하며 일몰을 즐길 생각이다.  우주로 진출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서 이젠 일출보다 일몰이 더 살갑다. 그날 창밖의 세상을 지겹도록 감상할 작정이다.


"철학자와 늑대"(The philosopher and the wolf)의 저자 마크롤 랜즈는 늑대와 11년 살고 자기와 동행한 생명에 대해 진솔한 책을 남겼다. 그는 "행복에 중독된 세상" 이란 소제목에서" 행복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의미"라고 말한다.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하는 질문에 "섹스를 할 때"라고 대답한다면 "행복을 하나의 감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고 그는 말한다. 흥미로운 생각이다.

 

창밖의 세상은 행복하려고 분주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세상을 자꾸 멀리하게 된다. 때론 창문을 닫고 보고 싶지 않다.  대신 마음의 창은 연다. 방법은 외외로 간단하다. 뉴스와 소셜미디어만 꺼도 세상의 창문은 굳게 닫힌다. 세상에서 생존에 필요한 몇 가지만 구하고 나머지는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과 화초, 애견이면 충분하다. 굳이 거창한 애국을 논할 필요도 없고 삶의 의미를 인문학적으로 추구할 필요도 없다.


21세기 세상은 생각보다 초라하며, 대를 이어 그 세상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기대에 못 미친다. 나는 창문을 닫고 그럼에도 햇살은 포기하지 않은 채 사람이 안 보이는 시간에만 창문을 열고 살려 애를쓴다.


그러면 좀 더 자유로워질 듯하다.        


         https://youtu.be/nzxJtqKQ8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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