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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Feb 23. 2021

얼음

                                                       Caution Falling Ice Caution

시카고 도심 커피숍 앞에 "주의"라는 입간판을 세워놓고 뒷면에 "다음 중 위험한 것은?"이라고 문제를 내놓았다. a. dice  b. mice c. rice  d. ice  "풋" 웃음이 나왔다. (정답 mice 아냐? 하면서) 영어의 라임 rhyme을 이용해 문제를 내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며 위험을 간접 홍보하는 그들의 재치가 재미있었다. 결국 나는 유머에 끌려 그곳에서 커피를 한잔 사고 말았다.  


 빌딩 곳곳에 위험 표지판이 세워졌다. 고층빌딩이 많아서 고드름이 위험한 것은 자명한 일이고 집 앞에서 넘어져도 고소하는 나라이니 건물주가 경고판을 세워놓는 것은 당연하다.




 컵에 얼음을 가득 넣고 콸콸 넘치게 콜라를 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거킹을 음료 빼고 사 왔다. 냉장고에 오랫동안 살아남던 얼음이 쏟아지는 콜라에게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아주 조금씩 녹아 죽어간다. 수십 년, 국 대신 콜라 먹고살다 콜라 끊은 지 오래였는데 지금 나는 범죄자처럼 얼음이 녹는 콜라를 구경하고 있다. 나는 펩시를 좋아하고 식구들은 코카를 좋아한다. 나는 민주당, 식구들은 공화당이다. 비밀인데 사실 펩시를 몰래 사서 소파 밑에 감춰 두었다. 고혈압 환자라 콜라 먹다 걸리면 잔소리에 체 할 것 같아서. 나도 나를 유혹하는 선악수를 냉장고에 두었다가 서로 마주치면 당황할 것 같아 숨겨놓았다. 하이, 펩시! 하이 노아! 그녀는 날마다 미소 지어 나를 유혹한다. 마셔? 말아? 어떤 날은 얼음에 물 타서 콜라라고 믿고 먹는다.(간장을 타면 색이 비슷할 텐데 생각하며) 그래도 콜라라고 확실하게 믿으면 뇌도 "콜라구나" 하고 속는다. 얼음물 마시면서 콜라처럼 트림도 한다.  


 얼음물 생각하면 오래전 만난, 지금 고인이 됐을 호스피스 환자 한 분이 떠오른다. 당시 그는 40대 후반으로 기억한다. 혈기왕성했던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인생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남아있는 시간은 가히 고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그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투정 중 하나는 무례한 태도였다. 처음엔 나에게 무척 무례했다. " 굳이 안 오셔도 됩니다!" 무례함의 원인은 통증과 삶의 허무였을게다. 우리가 저마다 주어진 시간을 다르게 받아 태어나지만, 삶의 통장에 남아있는 시간의 잔고를 모르는 것은 한편으로 축복이다. 하지만 우리가 말기암환자 병실이나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시간의 잔고가 쑥쑥 줄어드는 것을 보며 떠나야 한다. 예민함은 극에 달한다. 그도 그렇게 초조함을 분노로 표현했다. 모든 무례함에는 두려움이 깃들어있다.(그래서 멀쩡한데 무례한 사람에게 필요한 백신은 사랑이다) 엘리자베스 쿠블러 로스의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에서 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을 보인다는 견해가 아직도 유효하게 사용되지만 내가 보기엔 죽음 앞에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스테이지를 보인다. 어떤 이는 분노하다 죽고 삶을 성숙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삶의 잔고가 바닥날 때 초연하다.( 물론 초연한 것도 노력하고 애쓴 인고의 결과 겠지만) 분노가 잦은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얼음물을 마셨다.


" 제가 하루증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젠지 아십니까? 하나는 진통제 때문에 통증이 없는 오전 시간 잠깐 이랑 지금처럼 통증 없이 얼음물 마실 때"


그는 하루 중 그때만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고 서로 의지했던 군대 시절 김 선배도 돌아가실 때 그랬다.

 

 그렇게 통통하던 분이 마른 가지처럼 시커멓게 말라 병원에서는 더 이상 가망 없다는 통보를 받고 남쪽 작은 섬 작은 집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40대 초반에 말기 간암이었다)  미국에서 찾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오랜만에 기뻐하면서 그는 무엇인가 오독오독 씹고 있었다.


" 뭘 그렇게 맛있게 드세요?"

" 응? 얼음, 시원하고 좋아"


그는 내가 방문한 뒤 얼마 못가, 노인이 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차가운 얼음에 콜라를 콸콸 따를 때마다 가끔 얼음 결정에 두 사람 얼굴이 나타난다. 언젠가 나도 병이 오면 그들처럼 얼음물 시원하다며 고통을 참고 얼음이 맛있다며 오독오독 씹겠지...

 

 내가 뭐 대단해서, 삶의 잔고가 거덜 난 순간을 맞이하면 그것을 차분하게 만날까?  




 내가 사는 고층빌딩 아래, 지금 문을 닫은 고급 식당이 있다. 매무새로 보아 아마 한창때는 예약을 하고 들어가 나비넥타이 웨이터의 시중을 받으며 클래식이 연주되는, 야외에서 영화처럼 식사하는 그런 식당이다. 지금 그곳을 코로나가 전부 예약했다. 그러자 처마에 고드름만 흉가처럼 달렸다. 식당은 이미 망했을지 모른다. 그 집 앞에는 "Caution, Falling Ice"라는 팻말이 없다.  


 언젠가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증기가 되고 그것이 다시 비가 되어 또 세상을 적시겠지.


 나 같던 아이는 소나기 피해 우산 속에 소꿉장난하고, 조금 더 큰 아이는 원두막에서 소나기 피해 소녀와 앉아있고,  어른들은 "올해 비가 너무 많이 오네" 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뉴스는 "지구 온난화로 이상기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겠지. 그 비가 다 지금 매달린 얼음이다. 


 내 앞에 고여 있는 미시간호의 물은 수돗물 되어 내가 마시고 또 어딘가로도 흐르겠지.  오래전 우리 가족이 이민 수속 중에 실수로 미국 국경 넘어 체포되었던 그 무시무시한 나이아가라 폭포로도 흐를 테고, 우리 삶 낡며 변하고 또 그렇게 흘러간다. 악쓰고 힘쓰고 이기려고 살다 보면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겠지.


 코로나 덕에 요즘 몸에 힘 빼고 산다.

                   

Joyce DiDonato

 https://youtu.be/a8I5Gn3bV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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