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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Apr 28. 2021

낯섦 과 낯익음 사이

 길을 잃고 잠시 웃었다.


 사실은 내가 늘 다니던 길이어서 길을 잃은 것도 납득되지 않았다. 미시간호를 따라 도심으로 이어진 길을 그렇게 구석구석 매일 잘도 돌아다녔는데, 그리 걸으면 만보가 훌쩍 넘어 혈압도 차분해지고 숙제 다하고 노는 아이처럼 하루가 상쾌했는데...

 길을 잃으면 찾으면 되지 뭐, 뻔한 동네라 방위를 구분해 길을 짐작해서 원래 아는 길을 찾아 나섰다. 가벼운 패딩을 잘 입었다 생각하며 추운데도 작렬하는 태양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낯선 곳을 호기심 안은채 룰루랄라 걸었다.


 "와... 꼭 외국에 온 것 같아..."


 미국도 외국인데 외국에 온건 또 뭐람? 헛헛하게 웃었다. 미시간호 쪽에서 위에 보이던, 내가 서 있는 이곳의 풍광은 참 낯설었다. 깔끔한 조경하며 관광객을 토해놓는 택시, 마치 그리스 여행 때 지중해가 보이는 호텔 창문에서 느끼던 그 정취와 꼭 닮아 있었다.


 언제나 없이 나는 속 깊은 검푸른 물을 좋아했다. 미시간호는 그런 바다 같아서 이내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아름다운 그녀는 초록에서 파랑 사이로 변신하듯 화장한다.  파도와 갈매기 소리로 노래한다. 다만 인색함이 없어 맛이 짜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호수를 언덕 위에서 내려보 호기심이 발동했다. 찾던 길은 포기하고 빌딩 사이를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 민낯에 새겨진 낯섦을 관찰했다. "여기는 정말 부자들만 사는 곳이에요" 이 지역에 처음 이사와 아들이 동네 소개를 하다 했던 말이다. "여긴 얼마 하는데?" " 왜요, 사시게요?"  녀석 질문이 영악해서 나는 또 허탈하게 웃었다.


 마침내 낯익은 길이 나왔다. 낯섦이 느끼던 신비와 호기심은 낯익음 앞에 자리를 내주었다. 낯익음은 편안함과 무료함을 동반하고 하품하며 마중 나왔다. "모르는 길은 별거 아니었어..." 낯섦을 잠시 만났을 뿐인데 그 짜릿한 찰나가 아쉬웠다. 그렇게 우연한 일상의 낯섦은 아주 아주 빠르게 나를 떠나갔다.



 

내가 사는 동네, 단골 TJ max(철 지난 고급 물건 파는 상점?)에는 계산대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참 많다. 어느 나라나  매장 직원들은 감정 없는 로봇 같다. 옛날 미국 캐셔들은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나는 처음 미국 와서 그게 그렇게 좋았다. 낯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미국에 호감을 많이 느꼈다. 한데, 트럼프가 쓰나미처럼 지나간 여기, 80,90년대생 들이 사회 마馬력이 되어버린 세상, Covid19가 태풍처럼 지나간 대도시 미국은 차갑고 정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나같이 머리 큰 아시안 은 얻어맞을지 모를 불안을 매일 안고 산다. 나는 야구모자 푹 눌러쓰고 짙은 선글라스에 회색 마스크까지 큰 바위 얼굴, 검은색 머리와 동양인 피부를 안 들키려고 참 애쓰고 산다. 하지만  누가 봐도 chink 다. (어제 어떤 노인이 공격적인 말투로 너 중국이지? 해서... 베드로처럼, 아니, 아니, 난 코리안 아메리칸이야 라고 외쳤다.)  옛날 미국에서는 이런 대접받고 살지 않았다. " BLACK LIVES MATTER" 하던 흑인이 이젠 아시안을 때린다. 나쁜 놈들, 나는 새삼스럽게 흑인을 인종 차별하기로 결심했다. 엊그제는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를 덮치는 것 같아 화들짝 본능으로 방어자세 취했는데 그놈이 내 그림자였다. 나를 비 웃었다.


 "이게 전부 한국 뉴스 때문이야" 한국 언론은... 나와서 보니 참 가관이다.   




  이렇게 무서운 나라 매장 종업원이 옛날처럼 나에게 말을 다 걸었다. 나이는 40대 정도? 백인 여성이었다. " 아, 네가 고른 셔츠 정말 멋진 색을 골랐네!" 다정한 말투에 흠칫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 고마워. 정말 잘 고른 것 같아?" (실제 말은 Really? 달랑하나)  그녀는 활짝 웃으며,


 "우리 남편도 이런 색 옷이 참 잘 어울려, 내 남편은 일본인이야, 넌 어디?"


 쪽발이, 독도, 원전수, 소녀상, 머리에서 부정어들이 자동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난 스스로를 속이고 다정하게  "오, 일본? 난 한국사람이야" 내 어색한 미소를 들킨 것 같은데,  " 아, 그래?" 그녀는 대신 미소를 주었다. 잠시지만 우린 대화의 물꼬를 텄다. 많은 물건을 싸는 동안 한국과 일본의 미래, 젊은 세대의 변화 등, 내가 더 빠르게 많이 떠들었다. 따뜻한 웃음과 콧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매장을 나왔다. 스쳐 지나가던 낯섦이 미소 하나 때문에 낯익었다. 그때 이후 그녀와 나는 마주칠 때마다 낯익어서 친구처럼 대하게 되었다.          

              


 

원래 낯익음은 시간이 빚는다. 낯섦은 방금 태어난 아기 같고 낯익음은 점잖고 지혜롭게 늙은 노인 같다. 방송에 나오는 늙은 정치인이나 기업인에게는 시간이 빚어낸 성숙한 낯익음은 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술인. 배우에게는 가끔 잘 익은 모습이 보인다. 나도 민낯에 자신 있고, 쫄딱 망해도 여전히 당당한, 다치지 않은 영혼을 소유하고 싶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사람을 비교해서 내가 갑이 되고 내가 을이 되지 않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내가 되고 싶다.


 나는 삶의 낯섦과 낯익음 그 사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 이미 너무 오랜 세월 해외에서 지낸지라 내 머리는 서양인을 닮았지만 가슴은 한국인이다. 내 생각이 사용하는 언어는 국어고 생각에 사용하지 않는, 듣고 말할 때는 영어를 쓴다. 경계인은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정체성 때문에 떼 지어 하늘을 수놓는 가창오리 군무에 끼어 춤을 출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신 맞은 독수리도 아니다.


 나는 삶의 낯섦을 즐긴다. 그리고 낯익음도 여전히 사랑한다. 내가 소장한 물건 중에 으뜸은 옛날 옛적 미국의 저명한 교수님과 가까이 지낼 때 입던 붉은색 캐주얼 셔츠다. 그 옷은 벌써 수십 번 Donation 대상에 올랐지만 사면되어 지금도 내 옷방 한자리를 차지한다. 아마 죽을 때쯤 나와 함께 불살라지겠지. 이전에는 집이나 가구 같은 큰 물건에 탐심이 가득했다면 요즘은 가볍고 작은 것에 애착을 느낀다. 내가 미시간호를 떠난다면,  서울 종로에서 구입한 에밀레 종소리 나는 작은 놋쇠 종을 물에 바치고 떠날지 모른다. 왜냐하면 미시간 호수를 갖고 싶어 내 소중한 애장품 하나랑 바꾸려고...


 오늘도 나는 낯익은 지구를 타고 낯선 우주를 난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번 여행은 어릴때 매달려 타다 떨어져 날아간 지구본 놀이기구 타듯 어지럽게 돌고 또 돈다. 나는 지구에서 두 개의 좌석, 하나는 United Airlines와 다른 하나 Korean Air 구석, 내 영토를 가지고 있다. 비행을 마치고 지구에서 내리면 이번엔 태양계를 떠나 우주로 갈 작정이다. 요즘 무인 우주 보이저 호를 눈여겨본다. 1977년 발사되어 아직도 날고있는. 나도 지구에서 내리면 녀석처럼 혼자 우주를 날아야 하니까... 다음에 혹시 기회가 되더라도 지구는 다시 오고 싶지 않다. 인구가 적고 음악과 책을 좋아하는 생명이 많은 별에서 상쾌한 아침처럼 깨어나고 싶다.  


낯익은 오늘, 낯선 내일을 기다리며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행복한 비움을 꿈꾼다.       


     https://youtu.be/0UoTMCPkM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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