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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Oct 12. 2021

아무렇게나 말하고 싶었다

 마음에서 떠오르는 솔직한 말을 누구에게나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빠 엄마라는 첫 단어, 걸음마를 배울 때 까진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았지만 교육이라는 철장에 갇히고 사회라는 서커스단에서 밥 먹고 살다 보니 아무 말이나 입에서 나오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점점 조용해지고 절대 초고를 상대에게 들이미는 일은 사라졌다. 어찌 보면 성숙해진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내 순수함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미숙해진 것 같았다.  


 "한국이 좋아 미국이 좋아?"


 내가 한국에 오면 아직 순진한 친구들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는다. 그 저의 속에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사니까 그까짓 미국 별거 아니지? 하는 자만심이 느껴졌다. 나는 속마음을 들키기 싫어 넌 아직도 애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하며 그냥 웃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반반이다. 고국은 엄마 같고 미국은 아빠 없는 줄 알고 자랐다가 만난 아빠 같다. 나는 청년 때 아빠 나라를 만났고 아빠 나라와 살았다. 아빠의 언어는 달랐고 문화도 삶의 방식도 달랐다. 나는 수십 년간 아빠와 사는 법의 차이를 새로 배워야 했다. 가장 큰 차이는 소통의 차이였다. 엄마 세상에서는 말 수가 적은 것을 무게라고 생각했고 상대방이 속임수를 쓸지 모르니 항상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아빠 나라는 달랐다.


 그들은 말이 많았다. 모르는 사람하고 아무 말이나 하고, 심지어 진지한 생각도 소통하는, 한마디로 말이 많았다. 내가 전공하던 수업이 끝나고 엘리베이터에 우리 클래스 학생이 전부 탑승했었다. 교수님은 60대 후반 정도 백발의 노신사였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꽉 찼을 때 그 어색한 침묵이 몇 초 흐르자 아니나 다를까 말이 터졌다. 교수님의 농담이었다. 아이 같은 시시한 농담, 한국 같으면 채신머리없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로 비웃음거리 겠지만 모두는 진심으로 깔깔 웃었다. 이들은 문화와 언어에 유머를 장착하고 산다. 나는 거짓으로 웃어주었다.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을 하면서...


 아빠 나라는 그렇게 내 삶을 바꿔놓았다. 


 물론 내 영어는 주한 외국인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유창하지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이 단순해지고  첫 번째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자 마음이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아직 머릿속에서 한국말이 먼저 떠오를 때가 많고 그것을 번역하는 뇌의 노고는 계속되지만.




자세히 모르지만 그녀는 젊어서 미국에 들어왔다. 배운 것 없이 미국인과 결혼하고 한국어도 한국음식도 잊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녀는 한국사람과 한국말할 때 주한 외국인처럼 혀 짧은 말을 한다. 한국어 발음도 어색하고 단어도 혀만큼 짧다. (정상적 교포는 혀가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 아이는 한국에서 유치원 마치고 여기 왔는데 두나라 말을 유창하게 하더라 ) 그러던 그녀가 드디어 30년 만에 고국을 다녀왔다.


아휴, 어지러워 죽겠어. 빌딩도 너무 많고 간판은 왜 그리 많아?
사람들 목소리는 왜 그리 커, 길에서 담배 피우고 재채기 크게 하고 길에 가래침 뱉는 것도 죽겠어.
다신 가고 싶지 않아             


 조국?을 안 좋아하나?


 난 그녀의 모국 방문 후 터진 불평 가득한 일성에, 발전해 버린 고국에 대한 시샘 아닐까 하고 느꼈다. 아니면 나쁜 추억을 안고 이국으로 도망 와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한국 드라마를 한 개씩 보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말 어휘도 늘기 시작했다.


아이고 말도 말어. 이사하려고 엊그제 미국인 부동산하고 새집 보러 다니다가, 내가 집에 대해 한참 말을 하는데 부동산 남자가 날 가만 쳐다보고 멍하니 있는 거야? 그래서 내 말을 이해 못하니? 하니까 그 사람이 내가 모르는 너네 나라말 했어 하는 거야.  기가 막혀, 내가 미쳤지. 한국말하는지 영어 하는지를 구분을 못해. 난 내가 영어로 말한 줄 알았지 뭐야.


 연속극의 힘이다.


 그녀는 자기가 미국 말을 하는지 한국말을 하는지 구분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교포들의 영어를 보면 " 앤디 아~"를 많이 쓴다. 나는 안다. 그때 머릿속에 한국말로 생각한 단어가 영어로 안 떠올라서 그런 것을...


나도 중요한 면접에서 말이 꼬여 의사전달에 실패하고 "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고 하자 면접관은 " 나도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 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시험에 떨어졌다.




어머니 나라 한국에 오면 많은 것이 다시 혼란하다.


 기억을 더듬어 오랜만에 자전거 타듯 비척비척 안 넘어지고 이 나라를 달리면 될 성싶지만, 너무 많은 것이 변해서 난 외국인이다. 굳이 교포라는 신분도 머리가 커서 그냥 중국교포다. 우리나라가 세종대왕과 헤어지고 영어를 만나 말을 섞어 살기에 미국인이라 해야 좀 있어 보이는데 신분증 내미는 일 없을 땐 그냥 한국인 아니면 조선족이다.


 언어 문제보다, 내가 솔직하게 자기 생각 말하는 미국적 습관 때문에 한국에서 겪는 낭패는 생각보다 많다. 한국에서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게다가 나는 좀 순진해서 바보 같을 때가 많다. 이전에 한국 살 때는 조직의 힘이 강력햐? 서 내 직업이 바보스러운 내 순진함을 감춰 주었지만 난 조직을 떠난 지 오래고 해외에서도 조직원이 아니다.


말을 가려서 하기 시작했다. 웃음도 줄어들었고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냉소적으로 변했다. 다시 미국에 오면 또 적응이 안된다. 몇 년살면 한 달 정도? 적응해야 한국을 잊는다. 그래도 시카고 오헤어로 들어오는 국적기를 보면 반갑고 고국에 다시 가고 싶어 진다.





아무 말이나 막 해도 지적받거나 경계를 두고 판단하는 사람이 없는 곳. 


그런 곳이 가족뿐이라 생각하지만 가족도 아이들 머리가 크면 예의를 갖추어 상대해야 하고 마누라님은 참 이상하게 시간이 갈수록 상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신경증인지 모르지만 내 안에 나 혼자 사는 성을 구입했다. 그 성에는 성주인 나와 백성인 내가 산다. 성을 구입하고 혼잣말이 많아진 것도 성주라서 그런 건지 이 행성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신호인지 모르지만 성 밖에 나서면 자연과 벗하고 나 만의 세상에 산다. 한때 어릴 때 친구는 경계를 풀고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될 것 같지만 나는 벌써 그런 친구들에게 말로 상처를 받았다. 농담에 가시가 박힌 옛날이야기를 취중진담으로 폭죽처럼 터트려 술 안 먹는 내 맨 정신에 가시를 쏟아부었다. 내 뇌에는 가시가 박혀 주르륵 피가 흘렀다. 나는 한국에 오면 허접한 시간을 나누는 그들을 다신 만나지 않는다. 그동안 새로운 친구도 사귀어 봤는데 조심스럽다. 나도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다시 상처를 받기 싫어서 그렇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싶지만 몇 번을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동안 아무렇게나 말하고 살 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https://youtu.be/4srq4OoJl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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