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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Dec 12. 2021

내가 머무는 곳

 동생이 마련한 시골 아지트에 나는 가끔씩 머문다.


아지트가 러시아말이라는 걸 알았을 땐 허탈하게 웃었고, 군인들이 적지에서 은신할 때 쓰는 "비트"가 "비밀 아지트"의 줄임말인 것을 알았을 땐 더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내가 머무는 이곳 아지트는 화려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시골집이다. 


 민항기 조종사였던 승이 형이 자기 아지트를 일산에서 소개할 때 만 해도 나는 아지트는 지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형이 D항공 B747수송기를 몰고 내가 살던 미국 동네에 착륙할 때 비행기 트랩 밑에 서 있으면 "여기까지 어떻게 통과해서 들어왔어?"형은 자기 와이프 본 듯 놀라 기겁하곤 했었다. 우리는 서로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함없이 가까웠고 사실 나는 형과 아지트를 만들어 살아보고 싶었다.

 

 이곳은 매일 놀라운 새벽을 맞는다. 옆집에 가둬 키우는 수탉은 새벽 3시부터 어둠 속인데 암컷들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욕하는 것처럼 크게 운다. "꼬꼬댁"이 아니라 "꽉뚜와댁"처럼 들린다. 비명에 가까운 괴성에는 갈라지고 녹슨 쇳소리도 섞여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시간에 일어난다. 꽉뚜와 댁 덕분에 정성스레 새벽에 구운 브런치 글도 맛보고 내 글도 굽는다. 그때 내 머리엔 미국에서 가져온 보물 1호 B사의 육중한 헤드폰이 걸려있고 내 귀는 소음 차단의 위대한 과학기술을 달콤하게 맛본다.


 시골의 밤은 빛이 없어 어둠이 우주처럼 펼쳐지고 작은 소리는 더 크고 똑똑하게 들린다. 


 내가 새벽 1시쯤 실내에 있는 화장실이라도 가면 혹시 꽉뚜와 댁이 깰까 봐 불도 안 고, 귀뚜라미 보일러 깔아 놓은 방바닥을 귀뚜라미처럼 더듬더듬 헤매며 겨우 화장실에 도착한다. 화장실 문은 열기 전에 먼저 불을 켜고 심호흡부터 해야 한다.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귀뚜라미처럼 생긴 꼽등이는 단골손님이다. 이 녀석은 점프력이 대단해서 안 피하면 깜짝 놀란다. 이전엔 몇 번 잡아 놓아주기도 하고 죽여보기도 했지만 새벽부터 살생은 죄책감이 너무 커서 이젠 못본척한다.


 나는 은밀하고 차분한 새벽을 즐긴다.


 물론 내 몸은 이 새벽에 맞춰주느라 밤 9시면 쏟아지는 별빛처럼 쓰러지는 졸음으로 리셋되었다. 그래서 나는 윤석렬의 동선과 이재명의 소식을 전혀 모른다. 어차피 투표권 없는 이방인이라 침 튀겨가며 이 나라를, 위정자를, 한탄하던 친구들과는 벽이 있는 셈이다. 나는 사람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과 세상을 만들어 살기로 이번 방문에 결심했다. 이것은 고독도 고립도 아닌 나만의 고치다. 고치에서 나만의 변태를 반복해 언젠가 나의 색과 자태를 지닌 성숙한 나비가 되길 나는 꿈꾼다.     


 아침이 밝아오면, 아니 빛이 어둠을 가늘게 찢고 여명이 찾아오면, 


 코피 나게 분노의 소리를 지르던 꽉뚜와 댁은 마침내 쉼을 얻는다. 나는  소음을 막느라 무겁게 귀를 누르던 헤드폰을 풀어헤치고 마음껏 소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다. 우주궤도에 도착해 진공을 만난 우주인처럼 춤춘다.  아지트는 태초의 우주인 듯 무음이다가 곧이어 소음 대신 블루투스 스피커를 타고 음악이 흐른다.  내 공간엔 커피 향 냄새가 퍼지고 향기와 음악은 깃발처럼 나부낀다. 커피가 식을 때쯤엔 어김없이 차가운 흑암을 몰아내고 생명의 주인이 된 태양이 우리 옆집 담 넘어 키 큰 나무숲에 보름달처럼 교만하고 눈부신 얼굴로 걸려있다.  나는 기름 아끼려고 꽁꽁 닫아둔 마루 문을 유리문만 남기고 활짝 열어젖힌다.


 따뜻해서 나는 아침햇살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어머니 대신 나를 키우며 양장 기술 배우던 시골에서 온 누나는 그렇게 아침 햇살 가득할 때 마루에 나를 눕혀 귀지를 파 주었다. 어쩌면 내 머릿속 이상형 여인이 그 누나 일지도 모른다. 오동통한 허벅지가 따뜻한 베개처럼 느껴질 때, 낯선 곳에서 모든 것이 힘들었을  나이 어린 누나는 여섯 살 먹은 나를 시골에 두고 온 동생처럼 생각하며 가족 없는 슬픔을 달랬는지 모른다. 또 아침햇살은 항상 누워있던 내 눈을 눈부시게 때렸다. "눈부셔" 누나는 한 손으론 눈을 가리고 재빠르게 귀지를 판 뒤 "끝"하고  외치며 엉덩이를 때렸다.


 그때 그 햇살이 지금은 여기 마룻바닥 엉덩이를 때린다.  온기는 누나가 귓구멍에 "호"  불어주던 따뜻한 입김 같고 수능시험날 어머니가 새벽에 지어주신 하얀 이밥과도 닮았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오늘 할 일을 적은 메모를 확인하고 한 개씩 지워 나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상 노트북에서 할 일보다 마당에서 할 일이 많았고 초보 노비의 온몸은 멍 투성이었다. 그땐 일이 너무 고되 염전에 팔려온 노예 같다고 동생에게 투털거렸지만, 바리바리 싸들고 오빠를 찾아오는 동생의 하얀 웃음을 보면 그동안의 노고가 가치 있는 보람이었음을 느낀다.


 이처럼 바쁘고 힘들 때가 사실 행복이라는 진리를 사람들은 알지만, 성공하면, 돈 벌고 나면, 은퇴하면 쉬고 놀 거라 하다가 정작 그때가 되면 죽거나 뭘 할지 몰라 슬퍼한다.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하여 몇 가지정리 했다. 그 가짓수야 적어보면 끝이 없지만 우선 급한 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깊이 들어가 독립적인 내 세상을 구체적으로 꾸며 볼 작정이다. 이제부터 싫어하는 것 불편한 것은 보지 않고  듣지 말고 생각하지도 않으려 한다. 누가 삶의 편식이라 비판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내 삶은 누구에게 보일 것도, 누구에게 평가받을 이유도 없다.


영화 중에 전쟁 장르를 나는 무척 좋아하는데, 내가 전생에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은 젊은이 일수도 있고 비행기 사랑하는 것이 전에 쌩떽쥐페리로 살았기 때문일지 모른다.(승이 형이 전생에 대해 전문가라서 이런 생각을 허용하는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전생을 안 믿는다) 난 사람이 죽을 때가 가장 슬퍼서, 울고 싶을 때  주로 전쟁영화를 본다. 전쟁 속의 죽음은 소멸하는 순간의 잔상이 너무 깊어서, 오래된 구형 사진관에서 사진 찍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카메라 섬광의 찰나처럼 순간의 고통을 동일하게 느낀다.

 그래서 나는 여기 아지트에서 살해한 유혈목 뱀에 대하여, 그가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힘쓰던 근육의 섬세한 그 느낌 때문에, 나는 죽이면서 가해자의 죽고 싶은 슬픔을 경험했었다. 정치가의 탐욕에게 희생된 전장의 억울한 청년도 죽이면서 슬프고 죽으면서 눈물 흘렸을 것이다.        


 밤에는 옆집 개가 닭 대신 운다.


 하울링엔 울음이 섞여있다. 목소리 톤으로 보아 중형견이고 우는 소리를 들으면  녀석은 스트레스 때문에 운다. 옆집 아이는 한 번도 산책 나온 적이 없고 아이가 울 때 주인이 왜 그러니?라고 물어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시골 개는 쇠사슬에 묶여 하루를 보내고, 밤에는 목청껏 운다.


우리는 고용주에 묶여 하루를 보내고, 밤에는 술에 쩔어 서럽게 울고 괴롭게 토한다.


            

         https://youtu.be/vFdIJJxgH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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