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적응을 못해 몇 날 며칠 사경을 헤맸다. 아침에 눈 뜨면 여기가 시골집인지 미국집인지 도무지 분간을 못한다. 과거에는 미국에서 한국 다녀오면 쉽게 시차를 적응했고 한국에 들어가면 힘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도무지 미국 시간에 적응을 못한다. 글을 쓸 수도 없고 글맛이 당기질 않는다. 여기 오후, 한국 새벽시간을 맞춰 글쓰기를 시도해 보았다. 참 신기하게 몸이 반응한다. 글맛이 돌아오려나 보다. 한국의 강력한 기운은 이미 내 몸을 완전히 점령한 것 같다.
한국생활은, 늘 그렇듯 과거의 한 페이지가 되어 추억으로 남았다. 솔직히 말하면 시골 논둑길을 걸으며 여기 미시간 호를 그리워했는데 지금은 미시간 호를 걸으며 시골을 그리워한다. 내가 떠나오기 전 길냥이 세 마리 중 가장 강자였던 회색 고양이 스레트가 집냥이가 되고 싶은지 챙겨놓은 밥을 먹고 항상 집 마당에 머물며 서성 거렸었다. 내 인기척이 들리면 슬쩍 빠져나가 담장 위에 앉아 있지만 오랫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었다. 종이박스로 녀석 집이라도 만들어 줄걸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집이 자주 비어 있어 이젠 밥 주는 이도 없을 텐데 스레트와 헤어진 것이 못내 아쉽다. 아니 한국이 전부 아쉽다. 우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후회한다.
어머니는 아버지 묘지에 가면 늘 무덤 발부분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셨다. 구들장 시대, 우리가 겨울밤에 추울까 봐 아버지는 유담뿌라고 불리던 물통에 뜨거운 물을 넣어 수건을 두르곤 한 개씩 넣어주었다. 한 방에서 온 식구가 자던 시절에 윗목은 유담뿌없이 자기 힘들었고 아랫목은 더워서 잘 수 없었다. 우리 식구는 번갈아 가며 잠을 잤다. "아버지는 항상 유담뿌를 발 쪽에 끼고 주무셨지. 늘 손발이 차서 따뜻한 물을 좋아했어" 천국에서 아버지 만날까 봐 천국 안 간다던 어머니 행동은 인생이란 게 그저 미운 정 고운 정들며 살다 가는 것임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 어머니도 이젠 내 곁에 없다. 교포들은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면 점점 한국을 찾지 않는다.
한국에서 오지 캠핑을 준비하다 유담뽀를 만났었다. 어릴 때 보던 그것과 사뭇 다른, 플라스틱으로 정교하게 만든 유담뽀는 과거보다 성능이 좋아졌고 나도 유담뽀 좋아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 우린 가끔 부모를 원망하면서도 나이 들면 꼭 그들처럼 행동한다. 정말 열심히 유전자 개혁을 하지 않으면 내가 싫어하던 부모 단점이 고스란히 내 몸 어딘가 아니 아이들 몸에라도 묻어있다.
미시간 호를 다시 걷는다.
시카고 대화재로 거듭 태어난 놀라운 이 도시는 그래도 한국만큼 선명하고 멋진 꽃이 없다.
이제 글맛을 찾았으니 서서히 여기 이야기를 써 봐야겠다. 몇 안 되는 브런치 독자들이 기다려 주시겠지?
아직도 시간에서 완전히 깨어나진 못한 듯하다.
가끔 죽은 뒤에도 하늘에서 눈을 뜨면 지금처럼 여독에 빠져 게슴츠레 깨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