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고 파릇한, 아름다운 날개 아래 자닝스럽게 몸통은 꿈틀거리고, 아직 체온은 남아있어 미세하게 경련하듯 파닥이고 있었다.
한국의 시골집에 머물 때도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야자 매트로 만든 뒷마당 미로 위에 죽어가는 그녀는 곱고 하얀 날개 끝에 연두색으로 치장한, 날개 가운데 큰 점 두 개가 선명한, 몸은 회색이라 전체적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검소하고 단아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도 그 자리에서 마지막 삶을 요동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 거룩한 순간이 새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조팝나무 아래 으슥한 곳에 몸을 번쩍 들어 안아 옮겨주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 행성의 찬연한 빛을 조금이라도 더 보게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았다.
미국에서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낼 때 나도 나비처럼 아름답던 그녀를 잃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스물넷 생일 파티를 우리 집에서 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이곳에 왔을 때, 동네 하나밖에 없던 작은 한인교회에 스스로 들어와 당차게 자기소개를 하던 씩씩한 아이였다. 그녀는 모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싶어 TESOL 과정을 하러 왔다. 그녀는 원래 가진 싹싹함 때문인지 작은 한인교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교인의 절반이 국제결혼해서 외국인과 사는 늙은 어머니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원래 신앙을 가진 한국 학생들이었다. 그녀는 주말이면 늘 여러 가정에서 식사를 초대받았다. 물론 그녀의 살가운 성격이 한몫하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도 그녀 초대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주말 식사에 초대받으면 적당히 대접받고 적당히 정리하는 뭇 학생들과는 달랐다. 파티 시간 한참 전에 일찍 도착해 일을 도왔고 맨 나중손님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자기가 호스트인 것처럼 인사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뒷정리 마저 혼자 다 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유학을 결심하기까지 수없는 결심을 번복해야 했지만 다행히 그녀 삼촌이 어머니를 맡아주어 어렵사리 유학 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명문대학 영문학과를 나와서 그런지 언어의 기초는 잘 준비되어 있었다.
" 후, 제가 그동안 외운 영어 발음이 참 많이 다르네요, 참 나..."
그녀가 "Hero"를 습관처럼 "히어로"라고 발음했다가 수업시간에 낭패를 당한 날 저녁, 우리와 식사하며 학교에서 있던 일을 가지고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어이없어 초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나도 그랬어, LA, DMZ, EXIT, SALMON 등등... 한국 발음 때문에 교포들한테 놀림 많이 받았지."
특히 지금 여기 대학에서 경영학 교수로 지내는 내 친구는 농담 인척 내 영어 발음을 물고 뜯어 피가 날 때까지 씹었다. 나는 그놈에게 된통 당한 이후 의심 가는 발음은 반드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하던 마샤가 어떤 내 단어를 못 알아듣고 "뭐라고?"를 재차 한 뒤 "아, 000" 하고 내가 정확히 한 발음을 다시 똑같이 발음하면 전쟁을 해서 미국을 식민지 삼고 한국말을 강제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빠르게 우리 사회에 동화되었다. 한국에 없는, Debit Card를 사용하고 Cash back 하는 마트 계산대 앞에서 대화도 당황하지 않았고 수제 햄버거집의 노인이 흐물흐물 말하는 발음도 알아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영어의 절반은 눈치로 하는 건데 난 사오정이라 영어가 느린가 하는 생각도 그녀 때문에 처음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전거로 학교를 다녔다. 집은 우리가 알아보고 도와준 깨끗한 아파트를 얻어 만족스러웠지만 학교는 걸어 다니기에 조금 멀었다. 특히 나 여름이 뜨거운 우리 동네에서는 걸어서든 자전거든 통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씩씩하게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입에 대문짝만 한 미소를 달고 나타났다.
" 저, 돈 생겼어요. 차 사러 가요!"
사오정, 나는 못 알아 들었다.
" 이 더운데 무슨 차를 사서 마셔? 아이스 티, 먹고 싶어?"
그녀는 분명 나를 비웃고 있었다.
" 아니, 그 차 말고 진짜 차, 자. 동. 차!"
그녀 삼촌은 한국에서 무역업을 하는데 환율로 인해 생각지 못한 수입이 생겼다며 중고차 한대쯤 장만해서 학교다니라고 기마이 라며 입금해 주었다고 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안고 며칠 발품 판 끝에 유지보수가 쉽고 되팔 때 제값 받고 연료가 적게 드는 오년된 Honda Civic을 구입했다. 결정적으로 그녀 마음을 훔친 것은 자동차 색이 빨간색이었기 때문이었다.
" 솔직히 말해서 제가 한국 돌아가면 빨간색은 못 탈것 같아요"
그녀는 화려한 외모 뒤에 부끄러움을 감춰 두었다. 난 남잔데도 그 색깔 소화할 것 같구먼, 내가 새 차를 받아 운전할 동안 그녀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주는 한국 면허증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시 면허증을 준비해 필기 실기 다 통과하고 운전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나비 같은 여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에서 우대받는 것 같아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실기를 너무 쉽게 통과했다. 시험관은 떠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머금고 멀리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자기차에 태워 올리브 가든에서 식사 대접을 했다. 매일 게스트였던 그녀가 처음 호스트가 되어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한턱 크게 쏜 날이었다. 누군가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이 얼마나 짐이 되는지 그리고 다시 신세를 갚을 때 그 짐을 벗어버리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평소 적당한 말수로 분위기에 튀지 않던 그녀가 그날따라 말을 아주 많이 하는 것을 보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이번 주말이 자기 생일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 생일 어쩌지? 나가서 먹을까? 집에서 할까?"
아내가 걱정스럽게 말을 받자, 그녀는 파티는 안 해도 되는데, 만약 축하해 주실 거면 집에서 해요. 그 대신 제가 그날 고기랑 재료는 다 사는 걸로. 그녀는 참, 누가 데리고 살지 모르지만 복덩이다. 말 한마디, 생각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나이만 많았어도 며느리 하면 딱 좋으련만 그녀는 지금 내 처제급이다.
상상못할 일이 삶을 찢고 뛰쳐 나왔다.
생일이 지난 며칠 뒤, 그녀는 학교에서 좀 늦은 밤 귀가를 했다. 병원에서 연락이 온 것은 그녀 휴대폰에 우리 전화번호가 맨 앞에 저장되어 있어서였다. 우린 어쩌면 그녀의 보호자였다. 그녀는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경찰은 그녀가 신호대기로 정차하고 있을 때 뒤에서 졸음운전으로 보이는 트럭에게 사고를 당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내가 시카고 그랜드 파크에서, 한국 시골집에서 죽어가며 마지막을 사투하던 나비처럼 그녀는 찬연한 지구행성의 마지막 시간을 혼자 씨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