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작품에서 고도가 누구인지, 고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혹자는 고도가 신이라 하고 교도소에서 연극을 상연하자 죄수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고도는 자유라고 하였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도 고도가 누군지 모른다고 말한다. 고도는 기다림의 대상이다.
요즘 내가 기다리는 고도는 소나기다. 나는 그래도 중부에 살고 있고 무한대의 저수량을 가진 미시간호에 기대 물을 먹고살지만 서부는 잔디마저 키울 수 없는 가뭄에 시달리고, 멀리 고국에서는 오랜 봄 가뭄에 모내기마저 힘들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소나기 기다리는 것이 서부와 한국의 가뭄 해갈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싶지만 나는 한 번씩 세차게 등장하는 고도, 폭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며 인생을 사셨다. 내 형은 출생하자마자 병으로 유명을 달리했고 할머니는 모진 원망과 교묘한 박해로 죽음의 책임을 어머니에게 전가했다. 이를 못 본채 하던 아버지는 공범이었고 새벽기도 다니는 할머니는 교회 빌런이었다. 사랑을 외치는 교회 속에서 잡초처럼 교인 틈에 함께 자라는 악마들이 꽤 된다는 것을 지금 나는 안다. 어머니는 형을 잃고 얼마 되지 않아 나를 임신했다. 내가 태어나 처음 본 것은 할머니의 빌런 미소였다. 할머니는 내가 출생한 후에도 어머니를 주욱 괴롭혔다. 오랫동안 시달리던 젊은 우리 엄마는 나를 들쳐 엎고 한강으로 향했다. 더러운 세상을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서...
"그때 진심 죽고 싶었지. 그런데 너를 엎고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버스에서 틀어준 라디오에서 '내 주를 가까이' 찬송가 연주가 나오는 거야. 그날 한강에 내려서 몇 시간을 엉엉 소리 내 울었는지 몰라"
예민한 우리 엄마는 그날, 찬송가 연주를 듣고 위로를 받아 살기로 결심했고 덕분에 나도 살았다.
어머니는 시어머니로 힘들 때마다 울기로 했다. 화장실에 수돗물을 크게 틀어놓고 소리 안 나게 울기 시작했다.
오래전 인생 무대의 연기자, 악당과 피해자는 다 돌아가셨다. 남아있는 내 기억은 "수돗물로 소리 죽인 눈물", "내 주를 가까이 연주", "한강의 좌절" 등이다.
나도 살면서 어머니처럼 울어봤고 한강을 어슬렁 거려보기도 했었다. 군에서 동료들이 임무 중 사고로 유명을 달리할 때 군악대가 연주하는 "내 주를 가까이"가 그렇게 슬펐다. 그래서 남보다 더 깊은 슬픔에 빠져 아주 오랜 시간 죽음과 대면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 이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얼렁뚱땅 천국이라는 보험상품에 끼워 판매하는 종교의 무지를 무지 혐오한다.
나는 어머니의 수돗물 대신 소나기 맞으며 우는 것을 선택했다. 세차게 하늘을 찢고 뛰어내리는 소나기는 내 마음에 고인물을 밀어 내기에 충분했다. 미국의 소나기는 한국에 비하면 더 무섭고 더 요란하다. 우렁찬 천둥소리가 지나고 몇 초 후면 쌍 번개가 하늘에서 동시에 터지고, 번개는 목표물을 찾다 이내 레이저가 땅에 꽂힌다. 미국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날 우산을 쓰고 길을 걷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과 같다. 나는 그런 소나기를 맞으며 몇 번을울어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벼락 맞아 죽으라고 스스로를 내던진 절박한 순간들이었다. 세상을 죽을 만큼 아프게 살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은 아마 관에 누울 때 삶이 개운치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냥 숨 쉬고 산 것 일게다. 그것은 놀이동산에서 무서운 기구 한 번타지 않고하루 종일 시원한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이나 빨다, 오늘 하루잘 놀았다고 말하는 사람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죽을 만큼 힘든 고난은 역설의 축복 같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도, 향수에 쓰인 장미가 험지에서 고난을 이긴 장미라는 것도 그렇다. 혜성처럼 등장해 세계를 놀라게 한 소년 피아니스트 임 윤찬이 아니어도 좋다.
세상의 성공이 굳이 아니더라도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 생각하는 것 그 자체는 이미 삶의 위대한 승리다.
직장이 변변치 않아도 너희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나 재벌이 아니라도, 부모님이 침을 질질 흘리며 병상에 누워 계시고 그것을 뒷바라지할 돈이 없어 매일 죽고 싶어도 당신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것은 이미 삶을 성공하는 중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싱싱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나는 미국에서 조기유학 잘 마치고 한국에 돌아간 아이들을 많이 안다. 그중 어떤 이는 한국의 외모, 명품, 소셜 미디어 에 빠져 사는 것을 보았다. 결국 성형, 과소비, 시간낭비에 빠져 지낸다. 그리고 그들이 한국의 상류층을 형성해 돈으로 돈을 만드는 악순환의 뿌리에 기대사는 무리를 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국뽕이란 단어도 한국에서 알았다. 너튜브의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를 찬양한다. 그렇지 않다. 한국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청소년 같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자기만족, 자아도취, 자기 착각,자기애 그리고 영어 식민화에 빠진것은 열등감이라는 병을 가져 그렇다. 우리는 쓰레기 정보 쓰나미 에서 올바른 것을 골라 자기 삶에 적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사실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그런 우리는 고난이 주는 상처와 아픔에서 죽을 만큼 힘든 것을 이겨내는 눈물이 필요하고고도를 기다리다 쏟아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