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그러니까 어떤 이유를 붙여 스스로에게 변명하고픈 원인들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나를 찾아온 무력감에게 내가 감금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마다 생존을 위해 살아갈 이유의 정당성을 갖고 시간을 요리하며 살아가지만, 갇혀 있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은 장기간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삶의 의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직업을 가졌거나 사랑하지 않는 가정을 가졌거나 여타 의미없음의 이유로 천천히 질식하며 죽어간다.
갇힘이 서서이 목을 죄어오면, 차라리, 피아노 천재 윤찬이의 신들린 건반을 보는 게 낫다. 저 긴 시간 연주의 악보는 어떻게 외우지? 오케스트라와 협연에서 박자를 놓치거나 실수하는 것은 어떻게 예방할까? 그의 연주를 집중하고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것은 잠시나마 자기 삶의 질식에서 심호흡 하는듯한 쉼을 얻는다.
지난 주말엔 온전히 숨을 들이마시고 싶어 전인지의 4라운드 경기를 영상으로 졸졸 따라다녔다. 한 장면도 허투루 보지 않고 그녀의 심정이 되어 경기를 함께했다. 위기도 만나고 운도 따르는, 골프 닮은 인생. 어쩌면 항상 최선을 다해도 운명은 제멋대로 내 삶을 기록하고, 우리는 운명의 등장인물 정도라는 생각이 경기 내내 내 마음을 지배했다. 한타 차이 우승의 감격은 역사의 한순간, 한페이지를 기록하고 그 기쁨은 소나기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골프때문에 하루 종일 숨을 들이 마셨다.
인생의 무료에게 납치되어 감금되면그곳은 바쁜 직장이든 한 달 살기의 아일랜드 휴가지 이든 구속의 고통이 치료되지 않는다. 의료 기계가 내 몸의 고장 난 정보를 알려주지 않으면 , 역시 의사도 병의 원인은 알지 못한 채" 물 많이 마시고 충분히 자고 스트레스 줄이라"는 권고만 하고 다음 환자를 기다린다. 혹시 진통제나 안정제, 화학적으로 우리 감정을 거세할 농약 같은 약을 주어 환자가 조금 낫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기도 하지만 너무 오래 무료함에 갇히면 십중팔구 자해해서 죽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 남아야 한다.
갇혀 있다고 느끼던 나는, 골방 노트북에서 이 영화를 만났다. <센티 그레이드>
24일간 노르웨이 눈에 갇힌 부부의 이야기, 눈 덮인 차에서 두 달간 생존한 스웨덴 남자 피터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 그러나 내 시선을 빼앗은 것은 차에 갇힌 자의 손바닥이었다. 미국 대륙을 겨울에 자동차로 여러 번 횡단해본 나로서는 눈 덮인 오지에서 충분히 그렇게 갇혀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잘 이해한다. 사람도 차도 도시도 없는 황량한 미국 도로에서 밤새 운전해 보면 졸음보다 더한 자연의 고립 공포를 자주 느낀다.
나는 권태를 깨고 싶어 이 영화를 붙잡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화는 박한 평가 투성이었다.
만화 같은 마블 영화, 좀비가 떼로 등장해 벌레처럼 떼로 죽이는 공포 스릴러 영화, 몇 달 동안 미용 한번 안 한 여자귀신이 얼굴에 피 묻힌채 눈에 렌즈 끼고 주인공 따라다니며 장중한 효과음으로 사람을 쾅쾅 놀라게 하는 그런 시커먼 공포 영화는 더더욱 싫고 더럽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하얗고 재미보다 위기를 이겨내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영화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힘든 경험은 일단 기대를 안고 애써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밀려오는 허름한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의식이 무의식에게 조금씩 갉아 먹히다 잠에 취해 의식을 잃고, 엔딩 자막이 오를 무렵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 훌러덩 시계 한번 ,아까 코 풀어놓은 휴지 기억 못하고 그걸로 입에 묻은 침을 닦은뒤 아주 조금 남은 정신줄 부축해 화장실로 양치하러 가는 망작의 경험들이다.
센티 그레이드는 생존의 동기부여가 될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부류의 영화가 될지도 몰랐다.
평소 항공기 일등석 타고 영화 보는 게 내 버킷리스트 상단에 들어있어최근엔 침대에서 노트북 무릎에 얹고 "지금은 퍼스트 클래스 야간비행 중이야. 도착하려면 아직 아홉 시간 더 남았네. 흠, 역시 돈이 최고야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하고 혼자 일등석 상황극 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영화 보던 그 날은, 눈 덮인 노르웨이를 보고 싶어 침대 노트북은 포기하고 70인치 대형 스크린 앞에 혼자 자리를 잡았다. 식구들 하나둘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한국 마켓에서 신중하게 고른 짱구를 꺼내 들고 조난당한 인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느 포털은 영화를 이렇게 소개해 놓았다.
24일간 벌어진 극한의 생존 실화! 눈 떠보니 차 안에 갇힌 부부!
출산을 앞둔 소설가와 그의 남편,
노르웨이의 추운 지방에서 폭설을 만나 차가 얼어버린 눈 속에 갇혔다!
차의 시동은 걸리지 않고 전화기 배터리는 방전되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도와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영하 40도를 오가는 극한의 날씨와 얼마 남지 않은 식량.....
설상가상 만삭인 소설가는 진통까지 느끼는데...
과연 그들은 이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냉소적으로 영화를 보았다.
현실에 반하는 꾸며진 이야기가 곳곳에 너덜거리고, 위기 앞에 불평하는 소설가 아내 모습이 비추라 보는 내내 거슬렸다. 영화를 지켜내던 나의 마지막 인내는 엔딩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에 대한 작가적 호기심뿐이었다. 영화는 주인공 소설가가 남편의 시신을 뒤로한 채 출산한 아기를 데리고 탈출해 호텔을 발견하는 불가능한 마무리로 끝을 맺는다.
보는 내내 위기 앞에서 발휘되는 남녀의 숭고한 사랑의 힘을 보지 못했다. 남편이 죽어 나갈 동안 남편을 원망하며 공간을 그러쥐고 자기 마음대로 생사의 공간을 쥐락펴락하는 여자(그것도 작가) 에게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나는 영화를 끄고 노트북 전원마저 끄기 전에 내가 할 일 한 가지를 영화에서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