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본 곳은 미국 작은 마을에 한인교회에서였다. 그곳엔 대학이 있어 한국 유학생이 적당히 있었고 늘 그렇듯 이민사회는 한인교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날 스스로 교회에 출석했다. 자신은 한국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며 오래전 유학 왔을 때 태어난 아들의 국적문제 때문에 방문했다고 했다.
지적 호기심? 아니 솔직히 말하면나는 그의 지적인 성품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듯한 외모와 예의 바른 행동은 삶의 내면도 그렇게 반듯할 것 같은 느낌으로 여겨졌고, 나와 다른 사람과 내밀한 교류에서 얻는 삶의 꿀은 연애만큼 달콤해서 나비처럼 꿀을 찾아 날지만 그것을 얻는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솔직히 미국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는 한국사람이었다. 최악의 경우 어떤 사람은 그가 가진 학력부터 경력 전부가 거짓인 경우도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기회의 땅을 찾아 각자 사연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각자가 속한 수준의 공동체가 없었다.
미국은 교회 중심으로 한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서로의 직업과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민 초기에는 동양인 외모가 다 반가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미국인으로 사는 것을 선호했고 그것은 미국 백인들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변방의 경계인은 외로움을 암처럼 안고 살았다.
나는 새로운 등장인물, 그의 가족을 집에 초대했다. 그 자리는 잠깐이었지만 그것은 우정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테니스, 골프, 달리기, 산책을 함께 하는 사이로 점점 발전했다. 그는 나보다 선배였지만 나를 여기 미국인처럼 친구로 대해주었다. 그는 과거 육사출신 포병장교였고 위탁교육을 통해 한국의 명문대학을 거쳐 미국에서 박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군을 조기 전역하여 국방과학 연구소로 들어가 포 만드는 일을 했다. 본인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K9 자주포 만드는 일을 설명했던 것 같다. 그는 포를 연구하고 실험하면서 겪은 사고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고 검지 손가락 하나를 실험 중 폭발사고로 잃었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그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연구원들의 헌신과 숨은애국자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나는 그때 세상엔 묵묵한 음지에 애국자가 참 많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럼 실험할 때마다 무섭지 않나요?"
그는 담담히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잠깐 침묵하다 말했다.
" 모두 사명으로 알고, 목숨 거는 거지... 아니 어쩌면 안전할 거라고 믿는 걸지도 몰라."
그와의 교제 시간이 늘어갈수록 나는 그에게 수많은 삶의 시행착오 경험과 인생의 고뇌를 배웠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책벌레라는 점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박식한데 겸손했다. 가끔 지식을 액세서리로 쓰는 사람을 많이 봤었다. 여기서 내가 친하게 지내던 교수 한분도 박식한데 너무 혼자 말하고, 지난주 읽은 책의 줄거리를 밥 먹는 동안 내내 설명해서 싫었다. 항상 그를 만나면 간접흡연처럼 책 몇 권 읽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분은 대화 중에 나한테 들은 명언을 자기가 공부해서 안 것처럼 자랑하다, "그거 그때 내가 해준 얘기 같은데?" 하면 머쓱해서 말 돌리던 경우도 있었다. 경솔하고 가벼운 사람들하고는 거리 두기로 몇 번을 결심한 나에게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무거운 선물이었다.
가장 지적인 사람들의 가장 뛰어난 특징은 겸손이었다. 지성을 가장한 허영스런 인물들은 열등감을 극복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감춘다. 마치 자신의 민낯을 견디지 못하고 짙은 화장에 빨간 맆스틱을 매일 바르는 여자처럼.
나는 그에게 문제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게다가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탐구의 과정도 배웠다. 어쩌면 그가 연구자 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가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루는 내가 자주 다니는, 그는 처음 가보는 골프장에서 그가 스코어 카드의 정보- 홀의 규격, 방향, 슬로프, 해저드-등을 검토하고 짧은 시간에 제대로 공략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아니 처음 와 보면서 어떻게 알았어요? 저 홀은 오른쪽을 보고 티샷 해야 하는데..." 사실 나는 내기에서 이기려고 그 고급 정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항상 과학 골프를 쳤다. 그뿐 아니라 자기네 목사한테 들은 거라며 19금 농담도 잘했다. 그와의 만남은 항상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자 우리는 새벽 조깅도 더 열심히 매일 같이 하게 되었다.
한 번은 친한 학생들 몇과 밥 내기 10km 마라톤을 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자신도 끼워 달라고 했다.
" 에이, 선배님은 힘들어요, 요즘 애들이 얼마나 잘 뛰는데. 뭐 완주 이런 거 하려면 들어오세요."
그는 그날 달리기 시합에서 1등을 하고 모두의 밥을샀다. 20대 애들이 수두룩하고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도 있었는데 모두 밟아버렸다. 나이가 들어도 자기 관리하는 사람은 정신과 신체가 한 10년 더 젊은것을 그때 또 알았다.
그의 아들 문제가 다 해결되고 마침내 그는 귀국하게 되었다.
나는 이른 새벽에공항까지 그를 태워다 주고 세심하게 그의가족을챙겨주었다.
"한국 오면 꼭 우리 집에 와, 내가 원수 갚아줄게!"
"그러죠, 제가 그동안 참 행복했습니다."
그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마지막 게이트를 통과하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그의 아들도 나를 꼭 안았다. 그의 아내는 서운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또 말했다. "꼭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