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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Dec 27. 2022

잉여인간

도시를 얼음으로 바꾸었던 얼음공주가 잠시 물러났다.


눈이 그치고 도시가 더워지면서 눈 녹은 물들로 질척거리고 또다시 동장군이라도 출몰하면, 아이스도로가 될 불편은 상존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될지 모르는 예사롭지 않은 한기를 느끼면서도 아직 거리는 그런대로 다닐만했다.


 추위를 헤치고 도심을 쏘다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딱 브런치 먹을 시간이지만 아직도 내 혀끝에는 아침에 내린 에스프레소의 초콜릿 향이 남아 있었다.


 내가 사는 시카고 "스트리터빌"은 그나마 걷는 인파가, 관광객을 포함해, 많은 편이라 이렇게 오랜 추위를 뚫고 거리를 걷는 것은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우리 집은 네이비 피어 부근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어 오늘의 목적지 TJ Max에 가려면 대략 십오 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도시의 신호등은 곳곳에 오렌지 불빛으로 깜빡거리고 여기저기 도심을 지나는 911의 사이렌 소리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도로는 블랙아이스로 덮여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도시의 소음은  앙칼진 구급차 소리만 빼면 희미한 웅성거림으로 느껴졌고  춥기는 해도 내 안에 평화는 단단한 옷매무새만큼 굳게 자리 고 있었다. 


한 무리의 관광객이 무리 지어 스쳐 지나갔다. 이 도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골목엔 유명한 식당이나 가벼운 커피점보다 명품매장이 더 많았다. 그곳은 한국에서 엄두도 낼 수 없는, 아니 웹서핑을 해도 그처럼 사기 힘든 금액으로,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잭팟처럼 주체할 수 없는 동전소리 마냥,  왕창세일을 수시로 많이 했다.


흑인이나 아시안들은 이름이 크게 그려진 GUCCI 같은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글씨가 작거나 작은 마크만 그려진 명품을 좋아한다. 명품에도 격이 있었다. 그나마 내가 가진 명품은 가격에 가슴이 덜덜 떨려 선물로만 받은 것이지 내 돈 주고 산적은 없다. 해맑은 미소와 시끌벅적한 관광객의 얼굴은 세일을 잭팟으로 혼동한 나머지 착한 가격감동하여 우러러 나오는 감격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무리를 지나 명품관이 사라질 무렵 소시민들과 평민들이 애용하는 티제이 맥스가 나타나고 저 멀리 한 블록뒤에는 Marshalls과 Trader Joe's가 보였다. 근처 나이트클럽에서 밤을 새운 듯 한 젊은 흑인 여자들이 짙은 화장에 밍크코트, 반나체의 미니스커트를 걸치고 시시껄렁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지나갔다.




바로 그들이 서있는  신호등  아래, 내가 작년에도 보았던 백인 홈리스와 혼혈 닥스훈트 한 마리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애절한 구조신호, " Help me"를 들고 앉아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도심 주변을 둘러보아도 백인거지는 한 명도 없는데 그는 두 해 동안 일자리도 구하지 않고 같은 직업, 홈리스로 거리에 앉아있기를 아예 작정한 듯 보였다. 잉여인간...


우리는 거지에게 적선할 때 자선을 베푸는 마음보다 그의 형편을 평가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 백인이 어떻게 길거리에서 구걸을 해?" "구걸은 흑인이나 하는 짓이지" 하긴 나도 미국에서 동양인 거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딘가 있겠지만) 미국 홈리스들을 영화에서나 보니 낭만스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도시 쥐처럼 생존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한국이야 어이어이 월세를 못 내도 몇 달쯤 여백을 주지만 미국은 언감생심 다음 달부터 추방이다.  렌트집이면 매니저의  최후통첩과 이멜을 받아야 하고 자기 집이면 은행의 독촉장과 함께 퇴거를 명령하는 무서운 법적 고지서가 연이어 날아오고 다음날은 홈리스가 된다. 미국은 요행으로 넘어가거나 대충 봐주는 법이 없다. 한마디로 무섭고 엄격한 나라다.


 나는 해를 이어 홈리스로 사는 백인청년에게 인사를 건넸다. 뻘쭘하기도 해서 "내가 네 개를 잘 안다"라고 수줍게 말을 꺼냈다. " 너 혹시 기억나니? 지난해 겨울, 네 강아지 캔을 내가 사다 준 적 있었지?" 기억할리 만무하지만 청년은 애써 찡그린 건지 햇빛에 눈이 부신 건지 나를 보려고 위를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몸을 숙여, 가장 위험한 접근법이지만, 그의 애견에게 손을 내밀었다. 녀석은 내 손냄새를 맡더니 귓불을 내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어쩌면 자기 주인이 누구나 손을 내밀면 친근하게 자세를 낮추고 애교를 떨라고 귓속말을 해준 것 같았다.


 거지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때때로 교만하다. 불쌍해서 돈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불쌍하게 느끼려면 대단한 불구 거나 지나치게 남루한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한편견과 선입견을 주머니속에 지녔다. 게다가 돈을 놓아두는 깡통엔 수입 없어야 한다. 내 앞의 거지는 많이 달랐다. 누가 볼 때 "멀쩡하게 생긴 백인 놈"이었다.


 나는 작년처럼 재빠르게 거리를 풀어 헤치고 뛰나가 애견 습식사료 두 캔과  따뜻한 수프 하나를 건네고 20불짜리 지폐 한 장을 그의 손에 꾸깃꾸깃 구겨 넣어 주었다. 하루종일 사타구니에 넣어둔 그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날밤 나는 영화 "데드맨 워킹(1995년 작)"을 다시 보았다.

 살인자면서 살해당하는, 가해자 면서 피해자인 주인공, 세상에 어디에도 쓸모없는 잉여인간이란 원래부터 없지 않았을까?


  

연말엔 감사만 하자.



https://youtu.be/CiXVmAQ53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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