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이 뜸하던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 새로 사귄 친구다. 그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 나는 그를 초면에 알아보고 삶을 동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혼탁한 세상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다 직장을 옮겨야 했다. 전화 속에 그는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서울의 좋은 곳에서 이전의 경력을 살려 자리를 잡았다고. 사촌이 땅사면 축하해 줄일이다. 굿뉴스를 전해준 것도 고맙지만 한번 보자고 한 것이 더 고마웠다.
그는 자기 인생을 줏대 있게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지인이다.
점점 이곳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게 조금씩 한국인의 냄새가 배어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타인이 살아가는 거대한 흐름에 묻혀 사는 것이다. 근 삼십 년 밖에서 살아 뼛속까지 변한 줄 알았는데, 아니 아니 나는 국적만 다를 뿐 한국인이었다. 내가 잃기 싫은 이국적 습성이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남의 눈치 안 보는 것이었는데, 난 요즘 시골 읍내 단골 철물점에도 polo를 입고 나간다. 적당한 브랜드가 길거리에 넘쳐나지만 난 속으로 미국에서 산거라고 뻐대며 다닌다. 그건 아마 철물점 사장이 내 옷태를 보고 우대해 준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지난여름에는 뒷목이 심하게 아파 옷을 대충 입고 응급환자처럼 서울에 올라가 진료를 받았다. 그런데 의사의 진료 태도가 불쾌했다. 가족들은 네가 입은 옷을 봐라, 면도는 왜 안 했냐 하며 내 외모를 지적하곤 대우의 원인이 그것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의 훌륭한 의료제도 뒷면에 작게 쓰인 "간혹 허접한 의사들의 푸대접을 주의할 것"이란 경고문을 간과한듯하다.
아마 그때부터 옷을 잘 입고 다니기 시작한 것 같다. 어제는 적당히 입고 자전거를 타다 읍내에 장이 열려 신나게 구경을 하며 김파는 곳에 관심을 보였는데, 갑자기 아저씨가 이 손님 좋은 거 보여드리라 하자 가판대 아래 좀 더 비싼 김을 그의 아내가 내놓는다.
"있어 보이는, 멋있어 보이는..."
오직 나만의 나다운 내 인생을 다시 살아야겠다.
나는 원래 그렇게 살았고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엔 구정이 있어 좋다. 그것은 무뎌진 결심을 다시 한번 결의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