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 덕분에 여명을 소개받았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덕분에 나는 여명이 미소짓기 전의 기다림을 즐기기 시작했다. 기다림의 새벽에는 악기연습하듯 글을 두드린다.
브런치는 몇 년 떠나 있었지만 변함없이 반겨준 글벗 덕분에, 나는 가끔 만난 적 없는 그분을 내 머릿속에 떠올린다. 글수는 적지만 괴발개발 갈겨쓴 처음 이야기가 내 컴퓨터 하드에 말없이 들어간다. 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매일 다듬고 또 다듬는다.
처음엔 글깨나 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작 글만 깨우친, 외국인이 혀 짧은 소리로 우리말 하듯, 내국인이 어학연수 일 년 다녀와 혀가 꼬부라지듯, 그 정도임을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달았다. 문학을 사랑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전자는 무늬만 닮고, 사실 배웠다고 스스로 유식한 척 하지만 내 글은 언제나 혀 짧은 소리를 낸다.
브런치의 글은 유성처럼 훅 글 하늘을 스치고 지나가지만, 편집자 조물주 눈에 들어온 글은 우주정거장처럼 아주 오랫동안 사이버 하늘을 돌아다닌다. 그래도 별똥별에 만약 "좋아요"가 열명 정도 달린다면 우리에게 <진작가> 가능성이 우주먼지만큼 뭍은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난 방금 태어난 아기글의 냄새를 좋아한다. 청중이 없으면 연주자의 음악이 무슨 소용이며. 독자가 없다면 그 글이 또 무슨의미가 있으랴. 그래서 결심했다. 새벽미명에 태어난 글을 정성껏 읽어주고 글쓴이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좋으면 좋다 허그해 주기로, 물론 구정에 한 결심이라 유효기간이 짧을지 모르지만 타인의 글을 진심으로 경청하는 일이야말로 내 글을 들려줄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닐까. 먹어야 살듯 읽어야 쓸 수 있다는 기본에 충실한 것이 근본이겠지.
들어주는 사람, 읽어주는 사람, 보아주는 사람, 안아주는 사람, 어깨동무, 동행...
구정 새벽 무심코 생각을 마구마구 던진다.
과거에게 폭행당하고, 미래에게 쫒겨다니기 보다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오늘을 함께 사는 이웃과 사랑하는 가족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 이것이 스트레스 많은 나라에서 생존하는 유일한 비법임을 빨간 옷 입은 오늘 겨우 꺼내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