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집으로 돌아가는 티켓팅을 하고 나자 준비할 일이 많아졌다. 한국에 거주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동행하게 된 생명과, 공간만 있으면 여전히 버텨줄 무생물까지 많아진다. 나 란 존재는 우주에서 다양한 사람과 사물 그리고 이야기의 점들로 연결된 유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서울을 자주 왔다 갔다 하며 출국준비를 하다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 착잡했다. 물론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기 때부터 먹여온 길고양이도 그렇고 화분들은 어쩌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도 아지트의 공동책임자인 동생 가족이 있어 자주 관리야 하겠지만 어디 나만 하겠는가...
수도권에서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주말 기차는 생각보다 붐볐다. ktx를 누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itx를 타고 오는 맛은 호빵의 팥과 빵이 우연히 완벽한 배합으로 베물려 입에 들어올 때 느끼는 희열과 비슷했다. 옆자리는 다행히 몸이 작은 남자 청년이 타고 있다. 자기 좌석을 압도하는 육중한 옆승객은 항상 부담스럽다.
스르륵 잠에 빠져 한참을 간 건지 얼마나 잤는지 가늠할 수 없다.
웃기는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아들이 주한미군으로 근무할 때 서울에서 회식하고 영관급 들과 한국식으로 2차까지 갔다가 평택에서 기차를 못 내리고 종착역까지 갔단다. 그리곤 새벽에 거꾸로 다시 기차로 올라와 눈을 떠보니 용산역에 원위치되었더라는... 바보 같은 녀석 지애비 닮아서 완벽한듯하나 여전히 불완전한...
난 너와 다르다. 알람이 있잖니. 나는 여유 있게 역에 도착하고 항상 출발시간 15분 전에 알람을 해놓고 신나게 여백을 즐기지. 기차에 오르면 하차알람도 해놓지. 길고양이 밥 주는 시간도 혈압약 먹는 시간도 알람은 쉬지 않고 열일을 한다. 기억이 가 맛이 간 거지.
어릴 땐 나이가 먹고 싶다가 나이가 들면 하루가 아까운 건 나만 그렇지 않을게다. 언젠가 이 행성을 떠날 알람이 울리면 질질 짜며 궁상떨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잘해야 한다.
생각쥐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때 방송이 나왔다. itx는 여승무원이 타고 있어 역마다 안내방송이 시끄러워 단잠을 잘 수없지만 이깟 두 시간여 정도는 비행기에 비하면 참을 수 있다.
오늘도 그랬다. 단잠이 막 들라하면 그 여자(승무원)가 안내방송으로 잠을 깨운다. 게다가 이날은 이어폰도 빼먹고 온 바람에 세상의 쌩 소리는 다 듣고 지내야 했다. 결국 잠에서 깨어나 휴대폰을 뒤적거리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브런치 작가들을 만났다. "좋아요, 흠, 이건 아니지, 패스" 무슨 공모전 심사위원도 아니고 몇 개 읽다가 말았다. 머릿속에선 어제 교보에서 구하지 못한 "조너선 갓설"의 책이 아쉬워 생각쥐가 다람쥐 쳇바퀴 돌리며 후회의 틀을 돌고 있다.
"이게 무슨 냄새지?"
기차 안에 스치고 지나가는 익숙한 냄새, 한국에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수냄새였다. 어떤 여자가 이런 귀한 냄새를 풍기는지 보고 싶어 앞뒤를 두리번거렸지만 할머니와 남자들 뿐이었다. 냄새는 여운을 남기고 곧 사라졌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휴대폰 뉴스를 보는데 또 그 향기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분명하게 더 짜릿하게 났다. 찾아야 했다. 혹시 무슨 향수인지 묻고 싶었다. 아까보지 못한 여성이 뒷자리에 앉았고 분명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수냄새 같았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음미했다. 분명 자주 맡던 냄새다.
잠시 향기에 빠져 숨 고르기를 했다. 너무 좋다. 흠. 이대로 냄새가 남아있으면 좋겠다. 나도 이번에 톰포드 향수 다 쓰면 저런 냄새를 찾아야겠다.
" 평택, 평택역입니다. 승강장이 넓으니 내리실 때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순간 내 앞자리의 승객이 벌떡 일어섰다. 하얀 모자를 쓰고 사복을 입은 흑인병사 같았다. 그가 내 옆을 지나치자 강한 그 냄새가 나타났다. 우리가 미국에서 교포들끼리 농담할 때 말하던 그 "양놈 누린내", 미국인들이 데오드란트를 겨드랑이에 적당히 발라 버무리면 나던 바로 그 냄새.
향기의 정체는 바로 그 아름다운 냄새였다.
...
아, 미국집에 갈 때가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