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을 기다리는 곳엔 항상 즐거움과 슬픔이 함께한다.
영원히 안 올 것처럼 김포공항을 떠나놓고 지금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을 담고 인천공항을 나선다. 부모님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난 후 고국은 더 이상 내 인생의 특별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국의 시골살이를 체험하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여러 가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 자신을 스스로 응시하고 평가하는 첫 경험이었다.
성격이나 성품, 지적능력 혹은 전문성, 뇌의 건강과 영성 등.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곳에서 주어진 업무와 개인과제를 혼자 수행하다 보니 지난날 조직에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이 감에 따라 조금씩 더 높은 자리를 얻으며 타성에 젖어 살던 나를 나신으로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을 살았다면 더 잘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나는 과거의 나에게 F라는 점수를 주었다.
국적기를 타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광스럽다.
옆자리에 칭얼대는 아기나 좌석에 넘치는 몸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시카고까지의 비행은 식은 죽 먹기다. 원래부터 나는 하늘을 좋아해 비행기 수집과 조립에 빠졌었고, 어릴 때 큰돈 드는 RC비행기를 날리기도 했다. 군대도 공군을 다녀와서 그런지 바다보다 하늘이 훨씬 더 좋다.
국적기는 외국항공사와 달리 기내식도 맛있고 승무원의 정갈함과 서비스가 좋다. 게다가 크고 좋은 아파트에 살며 좋은 차 타고 다니는 것을 벼슬로 아는 한국 동창들이나 큰 교회를 다니며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처럼 나도 외국에서 숨죽이고 소시민으로 살다 국적기를 타면 어깨를 펴고 으쓱댈 수 있어서 좋다. 이 모든 것이 한국에 남아 애쓰고 수고하며 살아간 이들의 공로라 생각한다.
우연이지만 나는 시골집에서 내 민낯을 보았고 덕분에 나의 조국도 다시 만났다. 우리 세대가 일궈놓은 조국은 여전히 희망적이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느꼈다. 그릇된 노력과 잘못된 판단이 항상 정점에서 파국을 맞는다는 사실을 다시 공부했다. 화려한 철판과 플라스틱 기와로 스레트 지붕을 덧씌우고, 외제 자동차가 골목에 즐비해도 삶이 변하지 않으면 고학력과 부자라는 덧씌움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번 비행의 주제는 모차르트로 잡았다. 물론 하늘에서 먹는 와인 한잔과 위스키 온 더락 Whisky on the rock도 잊지 않았다. 아끼던 헤드폰에 준비해 간 모차르트가 흘러나온다. 삼십 대에 유명을 달리한 모차르트와 쇼팽은 평화를 보장하는 내 마음의 보석상자 같은 이들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죽음은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이므로, 저는 지난 수년동안 인간의 이 진정한 최상의 벗과 친숙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죽음의 그림>은 저한테는 더 이상 섬뜩한 모습을 전혀 띠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대단히 아늑하고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아시겠지만, 하느님께서 <죽음>을 <우리의 진정한 행복과 축복을 여는 열쇠>로 알아볼 기회를 얻는 행운을 제게 선선히 허락하셨으니, 저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1787.4.4 빈에서. (블로그 고싱가 숲에서 발췌)
와인 탓인지 머리가 맑고 총명해졌다. 아니 어쩌면 정시에 이륙하고 매너가 훌륭한 승무원이 내 좌석을 케어해 줘서 인지 모른다. 아니 엘비라 마디간으로 불리는 피아노 협주곡 21번이 나와서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태평양 상공에서 러너스 하이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 그래 어쩌면 인생의 내리막길은 없는지 몰라. 인생 2막이니 내리막길이니 할 것이 아니라 계속 오르막길, 정점을 향해 오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일 거야. 어린 모차르트가 말한 죽음이 삶의 최종목적, 최상의 벗이 더 맞는 표현일 거야. 연어도 산으로 소상하기 전에 기수역에서 시간을 보내잖아..."
갑자기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드물게 이번 비행은 잠깐씩 선잠 자는 것으로 휴식을 취하고 뇌는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내속의 나와 벗이 되었고 혼잣말하는 습관뿐 아니라 내가 나에게 주의를 주는 습관까지 생겼다.
어느덧 항공기가 미국 상공에 들어서고 마침내 오헤어 공항으로 착륙절차에 들어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우주여행을 했다. 한 가지 반가운 것은 내 사전에서 <내리막길>이란 단어를 지운 것이다.
벅차다. 공항에는 미국의 가족들이 나를 기다릴 테고 이제 비호감 트럼프의 나라에서 잠시 살아야 한다. 정치적 소음에 시달리다 해방되는가 싶더니 또 다른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시차적응을 마치면 제일 먼저 달려갈 미시간호를 생각하니 무척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