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를 보았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 책에 등장하는 삽화의 어린아이 처럼생겼다. 노란 머리 때문일 게다. 우리가 상상하던 예수가 그가 아니듯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고 상상하고 그것을 나누며 살아간다.
아이는 내가 오랜만에 방문한 윌리스 타워 한편에 아빠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타워 창문에 보이는 경이로운 하늘과 눈부신 아이가 겹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푸른 눈에 노란 머리 백인아이는 갈색눈에 검정머릴 처음 보았는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미소를 보낸다.
트럼프가 다스리는 나라는 비호감이지만 미국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나에겐 큰 불편이 없다. 아주 오래전 영주권자로 살아갈 때 느끼던 그 손님 같던 낯섦은 더 이상 내게 남아있지 않다. 신기하게 몸은 한국에 머물 때 한국인이 되고, 미국에 살면 미국인이 된다. 어디 가나 주인의식을 가진 완벽한 황금박쥐로 진화한 셈이다. 조만간 다시 귀국하면 한국국적을 취득해 완전한 이중국적자로 살아볼 생각이다.
아까 만난 아이 때문에 나는 서재에 먼지를 이불 삼아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어린 왕자를 깨웠다.
책의 어린 왕자는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윌리스 타워에서 마주친 아이로 변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책을 펼치자 아이의 아빠처럼 생긴, 사막에 불시착한 앙투안의 친절한 서론으로 막이 올랐다. 해설가들은 어린 왕자가 저자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환유라고 ( "어린 왕자"에서 환유(換喩, metonymy)는 중요한 문학적 기법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 대신 다른 연관된 대상을 사용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생텍쥐페리는 작품 전체에서 환유를 사용하여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난 다시 아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이야기를 평생 들려주었다. 아는 이야기지만 또 듣고 또 들으며 그때마다 토씨하나 다르지 않게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경이로웠다. 나이가 들며 교회 목사님도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아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을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윌리스 타워에서 만난 아이 때문에 나는 스스로 아는 이야기에 홀려 들어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 기억 속의 이야기는 여기저기 해져 구멍 나 있었고 나이 들어 다시 듣는 이야기는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보아 뱀 속의 코끼리 그림도 기억나지 않았고 바오바브나무도 검색해 보고 알았다.
" 도대체 뭘 읽었던 거지?"
며칠 전 기억이 떠올랐다.
" 왜 녹차가 이래?. 뭐지?"
사랑하는 커피를 물리치고 녹차를 선택한 것은 동양이, 한국이 그리운 건지 모르겠지만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녹차를 우려냈다. 뭐든 첫 향기와 첫 모금은 신비로와, 설레는 마음으로 향을 마시고 한 모금 훅 들이키는 순간, 신맛이 치고 올라왔다. 우웩, 마시듯이 뱉어내고 다시 한번 맛을 봤다. 시다. 녹차가 아주 시다.
에미나이(구글 제미나이)에게 물었다. "오래되고 상하면 신맛이 날 수 있습니다." 다 버리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다. 에스프레소를 마실까 하다가 물을 조금 섞어 연하게 마시고 싶었다.
"우웩 이건 또 뭐지? 또 시다."
범인은 주전자 물이었다. 기억이 났다.
오늘 아침 베이킹소다와 구연산을 섞어 행주를 삶은 뒤 아까워서 주전자에 부었다. 그거였다. 에미나이 에게 또 물어봤다. "그거 먹었는데 죽니? 아닙니다. 구연산은 일부러 먹기도 합니다." 나는 행주삶은 거를 먹었는데도?라고 돼 물어보려다 기계에게 미안해 포기했다.
기억이 가 맛이 갔다.
머리를 돌려 뽑아 잘생긴 얼굴의 신형 뇌를 장착하면 좋겠지만. 내 큰 대가리는 평생 써야 한다. 그러니 어린 왕자의 그림도, 그 아이의 별 B612도 기억 날리 없다. 삶은 잊혀 가는 것이고 잊히다 결국 나마저 잊으면 이 별에서 사라지는 거겠지.
"양을 그려줘"
생뚱맞게 등장한 쌩떽쥐페리의 어린 왕자, 엉뚱한 전개. 화자는 어른들이 이해 못 하는 코끼리 먹은 보아뱀을 그리지만 어린 왕자는 단번에 알아채 버린다.
“아니, 아니라고. 아니란 말이야! 보아뱀 뱃속에 있는 코끼리는 싫어. 보아뱀은 정말 위험하고 코끼리는 너무 크고 무거워.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다고. 그래서 난 양이 필요해. 양을 그려줘.”...
왜, 니체의 위버멘쉬 ( 위버멘슈/독일어: Übermensch)가 떠오를까...
니체는 초인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세 단계의 변화를 겪는다고 말한다.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표현되는 일련의 과정은 중간 단계를 건너뛸 수 없고 순차적으로 밟아 나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낙타는 언제나 등에 짐을 짊어지고 있는 존재다. 일반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명령을 짐처럼 짊어지고 그 명령에 순응하는 것을 나타낸다.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무거운 짐을 지는 정신, 복종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순응의 단계를 말한다. 나에게 무거운 짐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면 낙타의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자는 날카로운 발톱과 강인한 이를 가진, 앞을 가로막는 것은 파괴할 수 있는 존재다. 언제나 짊어져야 하는 짐 – 기존의 가치, 관습, 규범, 관계 –을 파괴하는 부정의 힘, 자유의지를 상징한다. 또한 이로부터 파생된, 외부로부터의 명령을 부정하였기에 생겨난 스스로에게 명령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하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폭발로 표현되는 부정과 파괴의 단계.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한다면 사자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며 쉽게 망각하고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고 행하는 존재다.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거치며 삶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 이 변화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수용하며 그 와중에 발생하는 부정적인 요소를 쉽게 망각하는 순수한 긍정을 나타낸다. 또한 어린아이는 놀이할 때 기존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규칙을 만들어 내고 또한 이에 기꺼이 따르는 자세를 보인다. 이처럼 삶을 순수한 긍정과 놀이로 보는 단계, 자기 존재의 자연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이 어린아이의 단계다.
이렇게 세 가지 변신을 통해 최후의 인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 중에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며, 허무주의의 시대에 어떻게 진정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니체의 결론이라 말할 수 있겠다. (니체의 초인 사상 최수훈/ 일부수정)
나는 초인같은 어린 왕자의 여정을 따라다녔다.
다른 소행성의 왕, 잘난 척하는 사람, 술고래, 사업가, 점등원, 지리학자, 그리고 지구 생명체...
앙투안의 눈에 비친 세상의 인물들을 따라다니며 구경한다. 우리 세상도 그렇지. 여기저기 전쟁으로 쑥밭 만들고 우리는 영상으로 구경한다. 사람의 피가 게임의 그래픽 같고 잿빛땅이 핏빛으로 물든 현실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지구 한 편에선 다시 살아난 히틀러의 망령들이 전쟁을 부추긴다. 네타냐후가 히틀러고 하메네이가 히틀러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편을 갈라 미워하고 서로를 죽이며 죽임을 당한다. 20억이 살던 어린 왕자의 시대와 80억이 사는 우리 지구는 다르다. 지구의 자연과 사람은 폭력배가 되었고 지금 우리는 "황순원의 소나기"라 쓰고 "황순원의 폭우"라 읽는다.
어린 왕자는 지구를 떠났다.
미소와 유머를 남기며 여운까지 선물하고 떠났다. 지난 내 글에서 35년을 지구에서 머문 어린 모차르트가 " <죽음의 그림>은 저한테 더 이상 섬뜩한 모습을 전혀 띠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대단히 아늑하고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할 때 그 역시 어린 왕자였다.
우리도 우리 곁을 떠난 어린 왕자를 그리며 언젠가 B612 소행성에 들어갈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한국은 오늘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한국의 시골집 노아의 방주가 금강으로 떠내려가진 않았겠지?
내가 돌보던 길 고양이 뭉치, 타이거, 보리, 업둥이는 살아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