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수도 계량기 교체작업을 보다가 이전에 잘 알지 못했던 사마귀 집을 발견했다.
어찌 보면 구석기시대 파충류 화석같이, 언뜻 보면 길게 생긴 번데기 같이 생긴 그 집은 시골생활을 하면서 의문을 품었던 이상한 물체 이기도 했다. 처마밑 오래된 나무에 오일스테인을 바를 때 갑각류처럼 붙어있던 그 집을 제거한 적도 있었고 자연농법으로 텃밭을 전환한 뒤 귀하디 귀한 사마귀 모시기를 하면서도 그 집을 몰라보았다.
이제는 그 집에 이, 삼백마리 가량의 새끼가 곤히 자고 있음과 그냥 이유 없이 섹스하는 인간과 달리 일 년 남짓 살면서 수컷은 생명을 담보로 암컷은 자녀의 안녕을 위해 죽음을 머금고 거룩한 동침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들의 현장은 그렇다. 수컷은 생존의 머리가 사정을 제어하고 욕망의 아랫도리가 꿈틀거리는 순간 암컷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수놈의 머리를 확 먹어 버린다. 죽음을 직감한 수놈은 온 힘을 다해 방사하고 그것이 앞으로 태어날 2세들의 생존확률을 높인다 하니 가히 충격적이다. 어미는 아이를 실리콘 같은 생명강보에 싸 여러 번 매듭을 짓고 자연에게 맡긴 채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다음 해 봄 느지막이 아기들이 태어지만 또 그중 한두 마리만 생존한다고 하니 이 또한 충격적이다.
내가 사마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젊어서 고국을 떠나 처음 살아보는 미국중부에 새로 지은 듀플렉스 집을 얻어 살 때부터였다. 그때는 지금도 못하지만 영어가 더 서툴어 뉴스를 틀고 한국 뉴스에서 보던 미국 대통령이 나오면 너무 반가웠고 " 커리어 career"라는 단어가 코리아처럼 들려 공부하다가도 유심히 화면을 주목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일 년도 못 가 향수병에 걸리고 말았다. 학교에선 안 들리는 영어와 씨름하고 세상에선 모르는 사회 시스템과 샅바싸움을 했다. 박찬호가 영어를 알아들을무렵 이단옆차기로 양놈을 때려눕힐 때 나는 너무나 통쾌해서 껄껄껄 웃었다. 거기에다 나는 눈치도 없고 알아듣지도 못해 인종차별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젊음을 질렀다. 박찬호가 세인트 루이스 경기에 왔을 때도 야구장 전체에 한국인이라고는 우리 가족과 몇몇 한인친구뿐이었는데 눈치 없게 한국말로 크게 소리 지르고 주먹을 부르는 주목을 받으며 마음껏 응원했다. 박찬호는 나의 스트레스 해소 기였다. 그의 엉덩이가 빵빵한 것도 자랑스러웠고 푼수끼 감춘 잘생긴 얼굴로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을 땐 가슴이 뻥 시원했다.
사마귀는 어디 갔을까?
그렇게 향수병에 걸려 한국 것이 무조건 좋던 시절, 집주인이 싫어할 텐데 나는 현관 앞 화단을 몰래 지우고 한인마트에서 구입한 깻잎씨를 그려 넣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 집 현관옆은 무성한 깻잎잔치가 벌어졌다. 나는 밥 먹다 말고 현관 앞의 깻잎을 따서 씻지도 않은 채 쌈장에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고향이 씹혀서 가끔 눈물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마귀가 나타났다. 지금 생각하면 유럽사마귀인데 한국의 사마귀와 거의 흡사했다. 익충인 것은 알아 녀석을 반겼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온 줄로 생각한 사실이다.
"아이고 녀석들 이민 왔구나 그래 그래 우쭈쭈"
그때 무식한 나는 생각도 행동도 용감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흘러 흘러 불혹을 지나 영어가 잘생겨지고 교미하는 것이 추하다고 느낄 무렵 나는 조금씩 유식해졌다.
흘러 흘러 다시 들어온 여기 한국시골에서도 나는 사마귀를 사랑한다.
얼핏 보면 무섭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고장 난 로봇 같다. 애기 때부터 우리 집에서 크는 사마귀는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골절상을 입기 쉽고 텃밭에서도 혹시 밟을까 봐 조심조심 다닌다.
어제도 수도 계량기 뚜껑아래 붙어있는 사마귀 집을 보며 자리를 옮겨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한다.
아이러니하게 해충 흰개미와 바퀴벌레의 친척, 기도하는 praying mantis는 나의 추억에 깊이 각인된 기도천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