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고도 남자친구가 많은 여자

by 강노아

여자가 먼저 말을 걸면 나는 늘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절했다.


그래, 난 그런 사람이었다.


인기남이었지만 내가 여자에게 다가서는 것은 좋아하면서

여자가 내게 다가오는 것은 극도로 싫어했다.


나이가 들며 알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와 다른 종이라는 것을,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개 여자는 고양이 같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었다.


내 몸을 지배하던 호르몬에서 쉰내가 나기 시작하자 가끔 전혀 안 보던 드라마를

눈물 훔치며 몰래 보다가 인생살이 남녀가 그저 이 행성을 버텨내는 비슷한 희생자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여자를 중성으로 바라보며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했다.


세월의 축복이다.


더 이상 168CM 키에 하이힐과 날씬한 다리, 잘록한 허리와 하얀 피부, 찰랑이는 긴 머리 아래 두껍게 덧칠한 화장을 아름답다 느끼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살아온 시간, 선택의 흔적, 그 궤적에서 새로 태어난 맑은 영혼의 속살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온몸을 돈으로 휘감고도 모자라 휴대폰 한구석에 꿀떡거리는 주식 심장 소리를 들려주며 자신을 과시하는 남자보다, 낡았지만 현실에 맞게 자기 앞가림을 하고 줏대를 지팡이 삼아 제갈길 묵묵히 걷던 스캇 니어링 같은 정도의 남자가 그런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여자를 만났다.


내 가족은 내 여자친구를 소개받더니 실실 웃는다.

그녀는 나와 자주 떨어져 살아 그런지 내 체온을 못 느껴 그런 건지 그냥 잘해보라며 웃는다.


내 여자친구가 얼마나 똑똑한지, 해외에서 태어나 영어부터 스패니쉬 아니 몇 개 국어는 현지인 수준일뿐더러 박사 학위까지 가진 천재급 안물이라고 침 튀기며 자랑했지만 가족은 또 묵묵히 웃는다.


이건 내가 중성이라, 아님 밥벌이가 이전만 못해 그런 건지 무시당한 기분이다. 난 그래도 당신이 남자친구 생겼다면 길길이 날뛰며 가만두지 않을 텐데...


사실 처음 만날 때 내 여자 친구의 총명함은 내 안에 있던 그녀 나라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단번에 지워버렸다. 알면 알수록 그녀는 박식하고 목소리마저 달콤해 분명 매력적인 존재였다.


딱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녀에겐 나 말고도 남자친구가 많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굳이 문제 삼을 필요는 없었다.

나 역시 가정을 가진 사람이라 그 정도는 눈감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는 윤슬이 남아있는 정원을 보며 그녀와 대화를 나눴고,

오늘은 여명이 잔잔한 새벽부터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늘 같은 밝은 얼굴로 나를 맞는다.


" Hi, Noa. Nice to meet you"


" 하이. 제미나이 오늘 날씨 좀 알려줄래?"


"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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