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랐다.
말투가 차분하고 세련돼 보였지만 그가 일본인이었기에 그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희끗한 머리와 살아온 얼굴에는 지나온 세월만큼의 나이테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품위 있는 자태에서 놀랄 만큼 고요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점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한국의 겨울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매서웠다. 추위는 시골 보일러에 상처를 냈고, 보일러는 결국 쓰러지듯 가동을 멈췄다. 새벽 세시, 바닥은 냉기로 가득했고 잠들어 있던 침대 위 전기장판만이 누운 이를 지키며 겨울과 맞서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내복을 꺼내 입고 털모자를 눌러쓴 채 랜턴을 들고 보일러 실로 향했다. 겨울과 싸우는 건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 집을 대피소 삼아 함께 지내는 길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기 고양이 밥풀이가 이 새벽에 뛰쳐나왔다.
" 아냐. 더 자, 춥지?"
밥풀이에게 따뜻한 물을 먹이고 보일러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껐다 켰다를 반복하며 심폐소생술을 하듯 시도하고, 귀를 기울여 숨소리를 듣는다. 급한 대로 화염감지기를 닦고 리셋을 눌러본다. 반응이 없다. 순환펌프 호스를 내려 공기를 빼고 다시 시도한다. 아직이다.
이번엔 오일밸브를 풀어 오일에 찬 공기를 뺐다.
"우르릉 쿵- 이잉~ "
살았다. 숨을 쉬기 시작했다.
피가 돌고 혈색이 돌아오자 집안은 다시 생명의 온기로 채워졌다. 날이 밝으면 엔진을 분해해 그을음을 닦아낼까 생각하며, 인문학도가 엔지니어가 된듯한 내 모습을 떠올리다 피식 웃음이 났다.
보일러를 손보고 나니 문득 내가 한국의 겨울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긴 생각은 필요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 이모와 사촌 여동생이 일본을 여행 중이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 그래, 우리야 좋지. 숙소를 조금 조정하면 되니까 어서 와, 여긴 설국이야."
여자만 둘이 다니다 듬직한 남자가 합류하는 게 반가웠는지 이모는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미국행이 아닌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언제나 비행은 즐겁다. 하늘의 공간을 차지하면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 든다. 어린 왕자가 날던 길에 잠시 올라선 듯도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탄자 같은 구름들이 비행을 축하해 주었고, 도착해 맞이할 설국을 떠 올리니 마음이 먼저 설렜다.
"환영! 한국 촌사람 일본방문"
번역일을 하는 동생다운 재치였다. 마치 자기네가 일본인인양, 스프링 노트에 한글로 환영인사를 적어 들고 있었다. 외국에서 가족을 만나는 일은 늘 반갑다. 옆집 같은 나라지만, 그동안 집안끼리 오래 원수처럼 지낸 탓인지 일본은 늘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우리는 차를 빌려 시라카와고로 향했다. 가족들은 여정의 중반이었고 나는 이들과 2박 3일만 합류한 뒤 돌아오기로 했다.
솔직히 이번 여행에서 내가 기대한 것은 명확했다. 료칸과 노천탕, 눈 덮인 시라카와고의 풍경, 그리고 가이세키.
이이지마의 소박한 료칸은 그렇게 내 기억에 남았다. 그루터기 같은 얼굴의 주인이 건네는 오모테나시, 소박하지만 정갈한 유카타, 이곳에 들어선 순간, 어째서인지 피정의 집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와 노천탕은 내가 그려온 장면 그대로였고 객실에서 바라본 설경과, 낯섦이 서서히 낯익음으로 익어가는 시간은 잠시 나를 잊고 나를 돌아보기에 충분했다.
깜짝 놀랐다.
떠나며 우리를 향해 인사하던 노인의 눈에서 문장들이 읽혔다.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감정이 분명히 거기 있었다. 수많은 손님을 맞이할 텐데, 가식 없이 사람을 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짧은 일본여행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은 잔상은
그 노인의 눈빛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나는 마지막 겨울을 그냥 보내기 싫어 중거리 자전거 라이딩을 나섰다.
금강 물 위에로, 그의 아른한 눈빛이 비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