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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Dec 22. 2019

작가로서 꼭 분석할 영화 (1부)

영화 쇼생크 탈출: 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이 글은 매일 글짓기에 고군분투하시는 브런치 작가들을 위해 준비하였다.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읽으면 더 효과적인 나눔이 될 것을 믿는다.>


상황에 따라 3부 정도로 작업을 해보려고 하지만  작업해 보면서 결정하려고 한다.


영화 이야기를 주로 하자는 것은 아니고 영화 분석을 통해 작가로서 가져야 할 

다양한 생각들을 함께 정리해 보려고 한다.



밥 짓기와 글짓기 중에 어떤 것이 더 쉬울까?


나는 둘 다 어렵다고 생각한다.  


요즘이야 전기밥솥으로 한번 누르면 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캠핑에서 하는 밥 짓기나 삼시세끼 염 정아 배우가 가마솥에 하는 밥 짓기는 

내공 없이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밥 짓기는 글짓기와 비슷한 정성과 노력이 요구된다.


두 가지가 다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기밥솥에 누르기만 하여 만든 밥 짓기와 

자판을 누르기만  하여 얻어낸 글짓기와 똑같이 그저 그런 평범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밥도  특별하게 맛있고 놀라운 밥이 있다.


"하얀 이밥( 쌀밥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에 소고기 국" 은

어렵고 가난할 때 소시민의 꿈같은 밥상 그림이었다.   

부모님 고향이 평안도와 황해도라 우리 집은 명절 때 하얀 이밥에 매우 특별하고 멋진 이북 만두를 

함께 만들어 먹고 자랐다.


이처럼 글 중에도 특별하게 고급스럽고 놀라운 글이 있다.


고급짐은 "문체가 남다르고 단어 하나하나에 갓 나온 이밥처럼 영롱한 기운이 서려 있으며  

읽고 나면 긴 여운이 남는 내용을 가진 글" 이라 정의하고싶다.


그래서 글짓기와 밥 짓기는 어렵지만 비슷한 과정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한 명의 작가가 작업하는 글짓기와 달리 작가의 대본을 기초하여 많은 전문가들이 감독의 지휘를

받아 여러 가지 소리를 동시에 내는 종합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오케스트라 같고 문학은 독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오늘 분석할 쇼생크 탈출은 1995년 1.28일 한국에서 개봉했고 지금도 한국, 미국 네티즌이 

1등으로 뽑은 인생영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이유가 있다.


내 경우, 지난 주말 신선한 영화 찾기를 오랫동안 하다가 이 영화를 우연히 발견했다.

줄거리도 다 알고, 오래전에 봤던 영화라 스토리 텔링 Storytelling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야기가 주는 신선함을 맛보지 못할 것 같아 한참 주저하게 되었다.  사실 2시간 좀 넘는 상영시간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영화에 들어갔다.


내 형편없는 뇌는 24년 전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드문드문 인상적이던 몇 가지 기억은 스냅사진처럼 저장돼 있었다.

그러다 영화 시작 몇 분 만에 모건 프리먼의 24년 전 모습과 구수한 목소리에 반해 

뇌는 촉촉하고 빠르게 젖어들고 있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내레이션 Narration이 "책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스토리 텔링 Storytelling의 기본기인  <언어의 자유로움>이 대사 속에 녹아 

아주 강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언어(문장)의 자유로움


언어의 자유로움은 글짓기의 가장 중요한 기초라고 평소에 생각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독수리가  날기를 배우기 시작하면 어미 품에서 버려져 가혹한 경험 훈련에 돌입한다.

이륙과 착륙을 배우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날기는 끝나지 않는다.  

기초가 완성되면 방향 바꾸기, 먹이에 접근하기, 잡아챌 때 어느 정도 힘으로  다리 근육과 시선에 

집중하기 등 많은 것을 본능으로 알고 실패로 배운다.


만약 독수리가 이착륙만 할 줄 안다면  독수리 새는 멸종했을 것이다.

<낢의 자유로움>은 독수리 삶에 가장 중요한 생존기술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언어 표현의 자유함이 없다면 자판 누르기 앞에 주저하기를 반복할 것이고 

결국 만들어진 글은 고치고 또 고쳐도 그저 그런 글로 남게 된다.





이 영화는 독특한 내레이션 구조를 통해 작가의 휴머니티 Humanity를 적당한 시간에 쏟아붓는다.

거기에 자유롭고 깊이 있는 언어구사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를 관객과 함께  추적한다.


레드(모건 프리먼)의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다루는 것을 보며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견인력을 어디서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생각하게 한다.

사건의 전개나 글의 구조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독자(혹은 관객)에게 

저항하기 곤란한 몰입을 제공하는 방법의 기술적 문제였다.


이 문제가 항상 내 글쓰기의 난제였다.

어떤 글을 어떻게 리드 Lead 해야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으면서 따라오게 할까?  

줄거리의 표면적인 힘 보다 내면에 숨겨놓은 작가의 의도를 어떻게 전달할까? 


영화는 부분적으로 그 대답을 제공했다.


언어의 풍부한 질감 Texture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끌어 가면서 독특한 맛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풍부한 질감이란 예를 들어 "오늘은 흐리고 비가 온다"를 " 내 마음처럼 우울한 회색 하늘은 눈물을 쏟았다"

라고 바꾼다고 가정하자, 더 좋은 표현도 있겠지만 이처럼 단어의 질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다.


작가 이외수는 내가 말하는 질감을 "글쓰기의 감성"으로 설명한다.


" 눈이 내리고 있는데 '수증기가 얼어서 형성된 흰 여섯 모 결정체가 땅으로 낙하하고 있네'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중략...'눈이 오네'  대다수가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이 감성의 출발이다."


작가 임정섭은 "생각의 묘사"라고 이 부분을 다르게 말한다. 


풍부한 질감은 감성의 표현 혹은 생각의 묘사 또는 상상력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국어 단어는 그 자체로 내 머릿속의 상상력을 묘사할만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출간 작가들은 어느 수준이 되면 편집자의 고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 단어 에는 자기 생명을 넣어(혼을 담아) 사용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흙으로 빚어 자신의 입김으로 생기를 갖는" 메타포와 유사하다.


에세이 작법의 경우 작가는 실제 사건의 줄거리를 기억하기 때문에 줄거리를 묘사하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가  정리, 교정 단계에서 이 질감을 보정하는 상황에 접하게 되는데 그때는 조금 늦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마련된 글의 길을 걷다 보면 길의 모양을 바꾸기보다 주변정리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글의 질감을 고려한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 말은 초고에서 줄거리보다 언어의 생기를 의식하며 떠오르는 단어의 발랄함을 남기자는 말이다.

생기를 넣어 작업하면 좋다는 뜻이다.



레드는 사실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야기를 견인하고 주인공 앤디(Andrew Dufresne, 배우는 팀 로빈스 )의 삶을 관찰하며 

그 안에서 휴머니티를 들려준다.  앤디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고민을 자신이 대답하는 꼴이다.


그의 근본 고민은 "희망은 없다"였다.


희망은 있는가?라는 이 무거운 인류의 숙제는 지금도 해답을 못 갖고 있다.


" 내 인생에 희망은 있는가?"  " 꿈은 이루어진다고?"


자신에게 술 취해서 물어보고 멀쩡하게 물어봐도 자기 답안지 에는 " X"가 제일 많다.

내 답안지 에는, 정신 바짝 차리고 말하자면 "꿈은 이루어진다" 라고 쓴다.

희망 질문의 해답을 얻으려면 신념 혹은 신앙 장치를 내면에 장착해야 한다.


희망을 먹고사는 사람은 꿈을 이루게 되고 희망을 씹고 사는 사람은 희망고문만 당하다가 포기한다.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꿈은 이루어진다는" 낢"의 증거다. 




원저자 스티븐 킹,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사실 1995년에 영화를 볼 때  위의 두 사람을 주목하지 못했다.


다만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중 저녁 바람이 부드럽게"라는 아리아를 듣는 동안 얼음이 된 재소자들과, 방송실을 장악한 앤디의 유유자적, 문 열라는 교도소장의 두드림 등 난타처럼 통쾌하게 감동을 느끼던 

순간만 기억한다.


이 감동은 획일에 대한 저항의 맛이랄까?  갇힌사회가 만들어낸 규율에 대한 복수? 이런 느낌이었다.

어쩌면 직장인들이 느끼는, 갇힌사회가 열린사회로  변하는 시작점에 살짝 열린 문을 통해 엿보는 기분?,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이런 것들을 누가 만들었을까?  감독 다라본트의 지분이 더 많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원작자 스티븐 킹은 작가들이 다 아는 사람이고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헝가리계 미국인으로 1959년생이다.  스티븐 킹이 1947년생이니까 이 사람들 10년 터울의 한계를 넘어서서 협업을 잘 한 셈이다.

두 천재 예술가가 만든 한 개의 이야기는 " 역시 이유가 있었군"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다라본트 감독은 대본 각색을 전문으로 하던 연출자다.

그는 중간지점의 전환 포인트를 그만의 독특한 각색으로 영화의 관점을 바꿔 놓았다.  


원작에는 없으나 (오페라 아리아를 방송한 것, 주인공의 나이, 레드가 원작에서 붉은 머리의 아이리쉬 백인,

앤디와 나이 차이, 작은 체구의 엘리트 백인 앤디가 영화에서는 190cm 거구에 신중한 사람 등) 감독이 심어놓은 새로운 설정은  원작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힘을 불어넣은 것이라고 본다.


그 힘이 영화를 최고의 걸작으로 만들어 놓았다.




부스터 Booster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가속을 내는 가속기" 정도 뜻으로 같이 이해하면서 가려고 한다.

전투기에도 애프터 버너 Afterburner라는 추력 강화 장치가 달려 있다. 

내 경우 이 "부스터" 단어를 생각하면 "애프터 버너"가 떠 오른다.


글에도 부스터가 필요하다.

사건 전개에서 독자들은 작가의 안내를 따라 " 뭘까? 뭐지?" 하는 흥미를 가지고 따라온다.

흥미는 이야기가 힘을 잃으면 바로 떨어진다.

따라서 이야기 곳곳에 부스터를 ON 해야 한다.


외형상 부스터는 강하고 요란스러워 보이지만 실제 부스터는 여백이다.

영화에서  말하자면 아까 오페라 아리아 연주를 틀어 사고를 치고, 교도소장과 간수장이 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앤디는 유유히 책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 옅은 미소를 보여준다. 

이 장면이  여백이다.


이 여백의 짧은 시간에 관객은 생각을 한다.

통쾌한 생각, 저러다 잡히면 죽을 텐데 하는 두려운 생각, 저 뻔뻔한 얼굴 멋있어라는 생각  등등

글에도 작가가 만든 이야기 길에 독자가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사실 독자는 작가를 다 믿지 않기 때문에 때론 작가의 글에 의문도 갖고 긍정도 하고 외우기도 한다.


또 하나

죄수들이 외부 작업에 인부로 동원되어 작업을 한다. 

간수장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 3만 5천 불을 세금으로 빼면  남는 게 없다 하고,

은행가 앤디는 간수장 아내를 통해 합법적으로 돈을 갖게 되는 제안을 한다.


그 조건으로 같이 일하는 죄수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선물해 달라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옥상에서 맥주를 마실 때,  구석에 앉아 동료들을 바라보는 옅은 미소도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


그 미소는 자유에 대한 여백이다.

감독은 여기저기 부스터를 심어 놓았다.


보통 우리가 사건으로 독자를 흥미롭게 한다면 이 영화처럼 부스터를 심어 여백의 동력을 얻어야 한다.

독자(혹은 관객) 에게 생각하는 시간과 자문하게 만드는 여백이  부스터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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