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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Dec 27. 2019

작가로서 꼭 분석할 영화(2부)

쇼생크 탈출 : 주제와 관련하여 

예능 복면가왕에서 자기 목소리를 숨기고 예선을 통과하여 결선에 가면 보란 듯이 가창력을 뽐내는 

가수를 본 적이 있다. 똑같은 사람이 노래하는데 어떻게 저리 다른 노래를 잘할까?

 

글도 그렇다. 같은 사람이 쓰는 어떤 글은 좋고 또한 나쁘다.

이 상이한 결과들은 왜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는 "글의 주제"에 따라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글은 작가의 주제에 대한 지식과 준비가 잘 되어있어 글이 수월하게 풀려 가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주제가 작가에게 어울리지 않아, 어색하게 보이기도 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은 주제를 잘 표현한 영화에 속한다.

원작의 글을 영화로 다시 쓰다 보면 주제는 조금씩 엇나가기 마련이다. "쇼생크 탈출"로 번역된 이 영화의 제목은 "쇼생크 리뎀션 Redemption"이다.


Redemption

[격식] 구원, 구함

[금융] (주식 등의) 상환, (주식이나, 채권) 현금화


"쇼생크 구원"  "쇼생크 상환"으로 번역하면 매우 어색하다.  "쇼생크 탈출"이 가장 적당해 보인다.

어쩌면 "쇼생크의 복수"가 리뎀션의 올바른 의역 일지 모른다. 그동안의 거짓을 모아 돈으로 바꾼 뒤 유유히 국경을 탈출하는 앤디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주제는 탈출이 아니라 자유


금융전문가로서 은행 부지점장을 지낸 경력은 순식간에 용해되고 그는 평범한 죄수가 된다.

인간의 삶은 이처럼 예기치 못한 우연들이 모여 운명을 가로지르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리뎀션의 "상환과 구원의 이중적 단어 의미"를 동시에 사용하는 기법으로 구원의 대행자인 종교의 민낯을 조롱하고 미국 금융시스템을 우롱하며  빼앗긴 자유를 다시 빼앗아 자신에게  보상함으로 "복수의 완성"이라는 큰 그림을 그린다.


원작자 스티븐 킹 과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는 휴머니티 Humanity에서 접점을 가진 사람들이다. 쇼생크 탈출 이후 다시 감옥으로 돌아와 사형수와 사형집행 교도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린마일 Green mile"에서도 그 둘은 더 깊은 휴머니티 감성을 마음껏 쏟아낸다. ( 약간 엉뚱한 이 영화도 추천드린다.  물론 톰 행크스의 젊은 모습은 강추다)  아무튼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지점에서 같은 이야기를 추적한다. 하지만 하나로 관통하는 " 인간의 자유"란 주제는 분명하다.


주제는 선명해야


작품의 주제는 항상 선홍빛을 띠고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독자의 시선을 끌만한 붉은 핏빛이어도 좋다.

이 색들은 관객과 독자에게 이야기의 싱싱함을 대언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맛있을 것 같은 욕구에 시동을 건다. 선명한 주제는 줄거리를  힘차게 밀어주고 어휘를 떠오르게 하며 작품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 책이 편집자라는 감독에 의해 다시 태어나듯) 


마치 세계 3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치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가 함께 노래하는 것과 같다.  

힘이 넘치고 함께 서로를 보완한다. 원작자, 감독, 배우가 서로 다른 높이의 음색으로 같은 가사를 노래한다고 생각해 보라.

 

선명한 주제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여객기의 배풍, 제트기류와도 닮았다.


이 영화는 주제의 선명함을 위해 감옥의 일상을 따뜻하게 사용한다. 자유가 억압당하고 일상이 자동화 기계처럼 무료하게 흘러가지만, 인간의 마음이 온기를 갖는 한 체험할 수 있는 여유, 관용, 베풂, 우정, 저항, 용기, 기쁨, 믿음 등을 놓치지 않는다. 육체는 감옥에 있지만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은 여전히 자유로운 일상을 소유한다. 교도소의 권력자에게 당당하며 매질과 독방 고문에도 천연스럽다. 회색지대에 갇힌 현대인과 그들은 여러모로 닮아 있다.


글쓰기도 선명한 주제를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나서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여비가 떨어져 가다가 낙오하거나 주저앉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정보의 타래를 쫒아 "아마데우스"를 다시 감상하였다. 작가의 시선으로 영화보기를 멈추고 영화를  영화로 보기 시작하자 모차르트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살리에리의 낡은 얼굴 근육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에게 사랑받은 자"란 뜻의 아마데우스, 신에게 평민 같은 살리에리의 몸부림과 신에게 가족 같은 천재 모차르트의 능력 사이에 인간이 느끼는 신에 대한 원망과 저항은 쇼생크 탈출 작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밀히 말하면 모든 작가들의 글 버릇은 모방이다. 자기 글의 조상이 있는 셈이다. 자기 "글 조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진정한 자기 글은 태어나지 못한다. 때론 자신과 타인에게 조금 오만하고 당당해야 한다. 너무 겸손하면 배운 대로만 하지 자신이 인생의 스승이 되는 경험은 하지 못한다.

 

선명한 주제는 모차르트처럼 자기 내면에서 들려주는 소리를 손으로 적는 일이다. 따라서 사물과 사람을 관통하는 자신의 주장과 시각의 프리즘으로 뇌에 찾아 들어온 생각들을 분류하고 다시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선홍빛 주제는 건지기 힘들다.  


주제는 흥미로와야

이 영화에는 노인, 브룩스가 등장한다.  노인 브룩스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다. 만기가 되어 출소할 무렵 석방을 원치 않아 인질극을 벌이고 감옥에 더 있고 싶어 한다. 인간 내면의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유를 얻었는데 오히려 억압을 편안해하고 있다. 결국 출소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노인 브룩스를 작가는 주목한다. "자유로운 인간" 반대쪽의 "길들여진 인간"을 표현한다.


나는 애견인이지만 개에게 "하이파이브, 탕~, "등 서커스 동작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면 길들여지는 것이고 길들이면 "견격"을 무시하는 것 같아 슬프다.


이처럼 작가는 자유의 반대점에 "길들여짐"을 배치하여 선명한 주제를 흥미롭게 극대화시킨다.


노튼 소장과 그의 오른팔 보안과장 해들리가 길들이기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인류가 늘 그래 왔듯 폭력이다. 질서를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된 폭력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폭력의 맛을 알아 버리면 인간은 악한 신이 된다.  미국 같은 정당한 폭력이나 북한 같은 불의한 폭력, 둘 다 악의 자식 들이다. 


주인공 앤디는 모든 폭력에 저항한다. 모든 형태의 물리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맞아도 갇혀도 매우 덤덤하게 고통에 대항한다. 나중에 회계사 능력으로 가해자의 탐욕을 채워주는 것은 복수의 작업이었다. 사기를 쳐서 사기꾼의 등에 비수를 꼽는 영화의 결말과 반전은 이처럼 흥미롭고 통쾌하다. 글쓰기도 흥미로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재미있어야 한다. 엉뚱한 지식인 김용옥 박사는 "어렵게 말하고 쓰는 놈들은 자기도 모르거나 자기를 과시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


재미가 없는 까닭은 "네가 재미없는 사람"이라 그렇다.


당신이 재미없는 까닭은 재미없게 살아서 그렇다. 골방에 앉아 글만 쓰면 사람은 재미없어진다.  게다가 외로운 혼자만의 작업이 생존을 담보로 쥐어짜기를 하다 보면 그곳에는 향기보다 악취가 더 많이 진동한다.  

조금만 "더, 더, 더 더" 하는 음주 단속기 앞의 간청처럼 글은 더 전문적이고 어렵게 써진다.


그런 작품은 재미없다.

    


주제는 혼이 담겨야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쇼탈, 이 영화는 시종일관 자유라는 주제를 설득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이 두발로 땅을 만나면서 더 이상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의 지배자로 오르게 된다. 내려왔는데 올라간 셈이다. 최상위 포식자 호모 사피엔스는 그때부터 신을 원했다. 하늘의 별을 보고 생각을 시작한 인간은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훗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를 원시부터 묻기 시작했다. 독립시켜 주었더니 고독해진 거다. 부모의 보호를 받아 기어 다닐 때가 차라리 좋았다. 서기 시작하여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자기를 책임지는 일이었다.


영화는 이런 인간 여정을 담아내고 있다. 자신이 무죄임을 앤디 자신은 알고 있고, 처음부터 해방을 구상하고 있었다. (  안쪽 울타리- 감옥뿐 아니라 바깥 울타리- 세상마저도 넘어선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존 스튜어트는 자유론에서


" 나는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 -법에 따른 물리적 제재 또는 여론의 힘을 통한 도덕적 강건-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 개인이든 집단이든-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 Self protection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자유는 인간과 국가의 최고 덕목이며 자유함은 인간의 존재 이유다. 육체의 질그릇에 담긴 세포, 혼자였던 세포가 분열과 집단을 이루고 눈을 만들어 그토록 보기 원했던 자연과 우주의 영광을 보고 뇌를 만들어 생각하고 그것을 저장하였다. ( 신념과 믿음에 따라 창조주가 했다 해도 되고 우연히 시작되었다 해도 된다.  중요한 것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은 무한한 저너머에 세상에 다 다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자유와 공감이라는 주제에 혼을 담아 표현하였다. 삶이라는 인간 여정에 어디에도 구속받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보라는...... (가끔 우리가 작품에서, 원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발칙한 생각으로 상상해서 쓰기도 하지만)


글쓰기도 그렇다.


혼을 담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 - 몇 번이고 고쳐먹은 - 을  독자들에게 사려 깊게 들려주는 것이다.


*사려

1. 명사 :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깊게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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