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사람과 살고 있지만 사실은 한 사람과 접촉한다.
그 한 사람은 내 가족이기도 하고 익명을 가진 타인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독자 때문에 글을 쓰기도 하고 한 사람의 댓글 때문에 뜨거운 상처를 입기도 한다.
직장에서 한 사람의 괴롭힘을 당해 참기도 하고 한 사람의 칭찬으로 힘을 내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한 사람, 그(그녀)와 다툰 뒤에 격앙된 감정을 진정시키려면 다른 일에
몰두하는 많은 시간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언론에 자주 등장해 영웅과 트러블 메이커 Troublemaker의 롤러코스터 Roller coaster를 타고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느라 자신을 희생하며 거대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는 연약한 한 사람이
또한 이 국종 교수 이기도 하다.
작은 미국마을에 살던 때였다.
한인이 별로 없던 마을이라 당연히 한인 의사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전립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찌리릭" 계속 아프다.
통증과 증상으로 보아 암이면 어쩌지?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걱정은 하루하루 늘어만 갔다.
비싼 미국 의료시스템을 주저하다 결국 동네 미국 병원에 진료신청을 했다.
작지만 종합병원처럼 진료과목과 병상을 골고루 갖춘 병원이었다.
긴장하며 내 차례가 되자 놀랍게도 동양인 의사가 나타났다.
" 한국분이시죠?"
작은 키에 갸름하고 야무진 얼굴, 나이는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대뜸 한국말로 질문했다.
나를 혹시 중국인이라고 생각은 안 하나? 그 생각은 잠시.
" 네, 한국 선생님이 계신 줄 몰랐네요"
그는 아픈 것을 확인하고 검사를 이어갔다.
몇 가지 사진을 찍고 문진을 한 뒤 진찰실 커튼을 치고 엉덩이를 까고 누워 몸속에 그의 손이 쑤욱,
깊숙한 장기를 더듬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부끄러움? 불쾌? 쾌감?
" 현재로서는 전립선 염으로 보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약을 먹고 치료해 봅시다"
시간이 지나 그와 친구가 되었다.
물론 나이 차이는 많지만 미국 정서상 친구처럼 왕래하였다.
그의 늦둥이 딸이 대학에 가면서 은퇴를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늙은 나이에 받아주는 곳을 찾아
북쪽 위스콘신 Wisconsin에서 남쪽으로 이사 왔다고 했다.
그는 서울의 저명한 의과대학 출신으로 대학병원에서 인턴과 전문의를 이수하고 시카고에서
미국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 처음에는 노벨 의학상을 탈 실력이 나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아주 호방한 성격에 자기주장과 철학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성경을 알기 위해 며칠밤을 새워가며 성경을 읽은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비해 엄격한 얼굴과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속 깊은 여자였다. 금방 사람들을 살갑게 대했다.
그녀는 위스콘신의 추운 겨울 새벽을 자주 말해 주었다.
" 우리가 직접 지은 위스콘신 집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새벽바람 불 때마다 내가 북한에서 피난 나올 때 생각이 자주 났어요"
그녀는 아주 어릴 때 피난민들과 내려오다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던 겨울밤을 들려주었다.
" 바람소리가 휘윙휘윙, 너무 춥고 배고프고, 어른들 틈에 끼어 잠은 자야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무서운 거 있죠?"
그들의 초대로 집에 모이면 항상 따뜻한 대접과 차가운 겨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국 선배의 타향살이 이야기는 인생 후배들 귀에 쏙 쏙 들어왔다.
그의 집에는 박사과정 유학생부터 청년 부부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비록 임시로 사는 아파트였지만 파티에 지장 없는 작은 뒷마당과 살림살이 없는 넓은 거실에는
주말마다 한 가지씩 가져온 음식이 젊은이들과 함께 방문했다.
" 아, 노벨상, 그 믿음이 세월이 흐르며 변하기 시작했죠"
그는 이제 짐짓 비장한 모습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작은 청중에게 삶을 풀어놓았다.
" 바로 한 사람에 대한 생각 말이에요 "
어느 순간 환자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노벨상보다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내가 그에게 처음 진료를 받을 때 남다른 정성이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러분 아직 젊지만 교수가 되고 직장에 다니고 단체를 이끌 때 한 사람에게 집중하면 좋겠어요"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면 나중에는 그 한 사람이 모여 힘이 되고
그 한 사람이 주변을 변화시킨다고 덧붙였다.
그는 당연한 진리를 실천하고 있었다.
실천하는 사람이 가진 언어의 묵직함이 모두의 마음을 쉽게 압도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대학병원 의사를 소개받았다.
고혈압 치료와 내 건강문제를 수준 높게 자문받기 위한 선택이었다.
진료비는 작은 병원보다 비쌌다.
기다림도 더 길었다.
그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진료를 마치는데 걸린 시간은 3분.
한 시간을 기다리고 3분을 만나고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나는 다시 그 병원을 가지 않았다.
전부 이해한다.
대학병원이 어떻고 의사들이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고 분쟁이 생기면 그 결과가 어떤지
의료천국 대한민국에 의료 그늘이 있고, 다른 나라는 훌륭하다고 감히 주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사람을 주목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국가에는
사람을 소중하게 취급하고 취급되는
경우의 수가
더 클 것이다.
미용실 헤어 디자이너가 결혼해서 다음 달 발리 Bali로 신혼여행 간다고 한다.
비행기 타는 것이 힘들다며 난생처음 괌 Guam에 해외여행 갔을 때 이야기를 들려준다.
" 그래도 미국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데 지나가다 하이! 하잖아요,
난 그게 신기하고 좋더라고요"
지난여름 작은 동네 산을 오르며 코 큰 서양 여성이 내 앞을 지나쳐 오기에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웃으며 인사했다.
" 하이! "
한국형 외국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채양이 아주 큰 모자를 눌러쓰고 달리기 자세로
경보 걸음을 하며 빠르게 내 앞을 지나간다.
내가 산짐승으로 보이나?......
나는 그날 이후 한국에서 누구와도 "하이"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어리 떼처럼 유리한 생존을 위해 모여사는 생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