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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나 Apr 27. 2022

얼굴

선생님 감사합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가는 얼굴


  아이들의 학교에 새로 교장 선생님이 부임했다. 큰 아이가 5학년이 되는 동안 교장선생님이 세 번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 컸는데 운영위원회 소집 때문에 만난 선생님은 은퇴까지 계신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교장선생님의 아이가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문득 떠오르는 분이 계셨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이사를 많이 다녔다. 이동하는 거리가 만만치 않았는데 대구에서 포항으로, 포항에서 의정부로, 의정부에서 다시 대구로 돌아가기까지 많은 이사를 하게 되었다.

  너무나 잦은 이사 덕분에 친구들은 나에게 ‘전국구’라는 별명을 지어줄 정도였고 더불어 전학 역시 빈번하게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학교를 다녀본 덕분에 다양한 선생님을 만나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존경하고 아직까지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 계시다.

  바로 의정부에서 2년의 학교생활 중 절반을 겪었던 6학년 6반 담임선생님이시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6학년 2학기에 대구로 이사 오기 전까지 선생님과의 만남은 가히 행운이었다.

  성악을 전공하셨나 하고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노래 실력을 가지셨던 선생님께서는 ‘얼굴’이라는 노래를 우리들에게 직접 불러주셨고 가르쳐주셨다. 어찌나 잘 부르시던지 그때 함께 불렀던 그 노래는 뇌리에 박혀 가끔씩 내 아이들에게 한 번씩 불러주고 있다.


© tsukiko-kiyomidzu, 출처 Pixabay

  선생님을 내 은인처럼 생각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소위 장래희망이라는 꿈을 꾸게 했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유달리 좋아하던 내게 선생님은 처음으로 소설가 또는 작가라는 직업을 알려주셨다. 그 꿈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맘을 떠난 적이 없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계속해서 노력 중이다.

  지금도 학교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는 왕따 문제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도 있었다. 선생님께선 절대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이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셨다. 만일 그런 일이 생겨 선생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날은 반 전체로 벌을 받는 날이었다.  벌이라고 해서 몽둥이를 들어 아이들을 때리는 체벌이 아니라 모두 눈을 감은 후 잘못된 점을 생각해 보도록 했고 생각이 정리가 되면 반드시 글로 쓰게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반은 유달리 큰 문제가 없는 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 외에도 반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셨다.

  2학기가 되어 전학이 결정되자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내 초상화를 그려보도록 했다. 수줍은 모습으로 의자에 앉은 내 모습을 아이들은 처음엔 짓궂게 킥킥 웃으며 그리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하나둘씩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완성된 그림 뒷면엔 편지를 쓰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50여 장의 종이를 가지고 문집을 만들어 나에게 선물로 보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전학을 간 후로도 잊지 않으시고 졸업을 앞둔 친구들이 쓴 글을 직접 편집한 문집과 졸업앨범을 보내주셨다.

© goldlightnings, 출처 Unsplash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셨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었지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교육청으로 문의를 해봐도 보강된 개인정보 보호로 인해 쉽게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하여 전직 프로그래머의 실력을 뽐내며 검색 신공을 날리다 선생님께서 나오시는 동영상 한 편을 보게 되었다.

  경기도 한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다 퇴임을 하시게 되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자들과 후배 선생님들이 함께 만든 작품이었다. 그렇게 영상을 통해 선생님을 뵙다 보니 더욱 뵙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갔다.


  어쩌면 뵙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닿았을까? 나는 큰 아이 친구 엄마의 소개로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 미사를 드리기 위해 교리 수업을 듣게 되었고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렸다. 그러다 신부님이 되는 사제서품식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우리 성당의 신부님들 중 가장 늦게 서품을 받은 보좌신부님의 지난 2015년 서품식 영상을 보게 되었다.

  신부님이 되기 위해서는 10년 정도의 오랜 기간의 수련을 통해 서품을 받을 수 있다. 힘든 과정을 겪은 후 받는 서품식인 걸 알기에 감탄을 자아내며 영상에 빠져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다다르자 각 신부님의 부모님과 함께 촬영하는 장면이 있었다. 신부님의 부모님들은 아들이 정말 자랑스럽겠구나 하고 나 역시 엄마 미소로 뿌듯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그 자리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선생님께서 서 계신 것이 아닌가!

  참으로 꿈같은 우연이었다. 처음으로 다니기 시작한 성당의 보좌신부님의 동기가 바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리 선생님의 아드님이었다.

  그 길로 성당으로 달려가 바로 보좌신부님께 여쭤보았다. 신부님께선 그 동기분의 근황을 알고 계셨고 연락해 본 후 알려주시기로 했다. 그 후 성당에서는 부활절 등 바쁜 시기가 지속되었고 신부님을 뵙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혹시나 잊으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나는 세례를 받고 성가대에 입단해 열심히 활동을 하던 중에 신부님께서 선생님의 연락처를 건네주셨다.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그동안의 안부와 잊을 수 없었던 친구들의 소식도 전해 듣게 되었다. 피아노를 잘 쳤던 윤아는 외고 선생님이 되었고 다른 친구들 소식도 들으면서 다시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골수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병화가 치과의사가 되어 선생님의 이를 치료해주었단 소식에 정말 깜짝 놀랐다. 너무 보고 싶은 내 친구들.

  선생님께선 퇴임을 하시고 사모님과 산행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고 했다. 두 자제분을 신부님으로 하느님의 곁에 보내시고 많은 은총을 받고 계시는 듯하다.


© gpiron, 출처 Unsplash

  

  선생님이 뿌린 결실들이 이제 사회에서 큰 축을 이루고 있다. (그중 나도 한몫한다고 생각하고 싶다. ㅋㅋ)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의 반 학생들로 거쳐갔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무심코 던진 말들이 작은 머리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말이다.

  좋은 선생님들이 많다. 그 선생님들이 좋은 사회를 만들 학생들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선생님을 존경하고 기억한다. 이렇게 되도록 부모인 나 역시 교육에 발맞춰 아이들을 잘 키울 것이다. 고럼 고럼.

 


[곰단지야] 2019.02~03. 작가광장. - 도서출판 곰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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